커피 한 잔의 행복처럼
요 며칠 날씨가 참 좋습니다. 선선한 기온에 미세먼지 없는 하루, 때마침 길가에 핀 벚꽃도 참 예쁩니다. 이런 날은 별다른 일이 없어도 밖에 나가야할 것 같습니다. 야외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 거기에 분위기와 어울리는 음악까지 더해지면 말 그대로 소확행이 별건가 싶습니다.
일상 속 소소한 여유와 행복, 제가 생각하는 메제 라이펜타의 매력과 닮았습니다. 최근 들었던 여러 이어폰들이 각자 나름의 개성을 뽐내지만 라이펜타는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본인의 매력 포인트를 과시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대신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안락한 분위기를 제공해주는 타입입니다. 덕분에 음악을 오래 듣고 싶어지게 만다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강렬함보다는 편안함으로 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어폰, 메제 라이펜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이브리드 펜타 드라이버 이어폰
최근 들어 메제에서 하이엔드 라인업을 선보였습니다. 이제 헤드폰으로는 엠피리언, 이어폰은 라이펜타가 메제를 대표하는 제품이라 하겠습니다. 이전 제품들과 비교해서 갑자기 가격이 너무나 많이 오른 것 같지만 지난 번 이미 엠피리언을 통해 메제가 가격에 걸맞는 제품을 선보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하이엔드 제품 제조사 반열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라이펜타 역시 제품의 만듦새만 보아도 확실히 귀티가 흐릅니다. 전체적으로 굴곡이 많이 사용된 디자인의 유닛은 CNC 밀링을 통해 가공된 알루미늄 섀시로 엠피리언에 이어 수려한 외모를 자랑합니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처리된 모서리들은 편안한 착용감에도 한몫을 단단히 합니다. 유닛의 사이즈가 작은 편이 아니어서 귀에 착용시 외이도 주변이 꽉 채워지는 편인데 그럼에도 이물감이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닛 전체를 짙은 푸른빛으로 마감한 가운데 양쪽 플레이트에는 메제 브랜드 로고가 음각으로 새겨졌습니다. 이전부터 보던 로고인데 유독 라이펜타와 거기에 새겨진 메제 로고를 보고 있으면 마세라티가 떠오르는 건 저만 그런가요?
메제의 세심한 마감 실력은 사실 수려한 외관보다는 꼼꼼한 내부에서 보다 여실히 드러납니다. 다이내믹 드라이버와 BA 드라이버가 유닛 내부에서 각각의 독립적인 챔버에 배치되고 드라이버부터 노즐까지 연결되는 보어 역시 금속으로 제작됐습니다. 드라이버의 배치, 보어의 길이 및 직경은 멀티 드라이버 이어폰에서 음질에 민감하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들입니다. 개별 드라이버에서 만들어진 소리가 청자의 귀에 도달할 때 제작자의 의도대로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위상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이어폰의 설계에서 해결되어야할 문제이지만 이후 제작 단계에서도 약간의 오차로 인해 의도치 않게 위상이 틀어질 수 있으므로 정밀한 가공을 요하는 부분들은 최대한 오차를 줄이는 방식으로 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로 최근 많은 이어폰 브랜드들이 노즐 및 보어를 금속으로 가공하여 사용하는 편입니다.
‘펜타’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라이펜타는 총 다섯 개의 드라이버가 사용됐습니다. 1개의 다이내믹 드라이버와 4개의 BA 드라이버가 각각 2개씩 묶인 3-웨이 방식의 하이브리드 이어폰입니다. 아쉽지만 각각의 드라이버가 어떻게 음역대를 나누어 담당하는지는 스펙에서 확인할 순 없었습니다. 다이내믹 드라이버가 사용된 만큼 내부 기압을 밖으로 배출시킬 에어 벤트가 필요한데, 이 벤트 역시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누가 디자인의 메제 아니랄까봐 두 개 중 상단에 위치한 큼지막한 벤트의 디자인이 예술입니다. PES(Pressure Equalization System)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벤트는 다이내믹 드라이버 후면 공간과 연결되어 이름처럼 이도-이어폰-외부의 기압을 평준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외에 그 아래 배치된 상대적으로 작은 벤트는 다이내믹 드라이버의 전면과 연결됩니다.
이어폰 유닛과 케이블은 mmcx 단자 방식으로 채결됩니다. 기본 구성품으로는 3.5mm 케이블이 들어 있습니다. 2.5mm 혹은 4.4mm 밸런스 케이블은 별도로 구매해야 합니다. 사용해보지 못했지만 별매인 밸런스 케이블의 인기가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약 20만 원의 금액을 투자할 만한가 봅니다. 케이블의 성능인지 함께 사용하는 기기 밸런스단의 성능인지는 따져보아야 하겠지만요. 요즘 커스텀 케이블 가격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가격대로 출시된 편입니다. 케이블 구성이 아쉽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머지 구성품들은 알찹니다. 다양한 사이즈의 폼팁과 실리콘팁, 6.3mm 변환 단자와 기내 변환잭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이어폰 파우치입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바라보려해도 제가 이제껏 보았던 어떤 이어폰 파우치보다 멋집니다. 내구성과 실용성, 그리고 디자인까지 모두 잡은 파우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실제로 종종 게시판에서 라이펜타 이어폰 파우치를 구한다는 글이 보이니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저뿐만은 아닌가 봅니다.
여유있는 헤드룸이 들려주는 편안함
이제껏 제가 만져본 메제 기기들을 놓고 보자면 메제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소리 방향이 확고히 서있는 브랜드입니다. 저는 메제만의 사운드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편안함’이라 하겠습니다. 참 애매하죠? 편안한 사운드라니.. 하지만 편안함이라는 단어만큼 메제와 잘 어울리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메제 제품들은 오래 들어도 귀에 부담스럽지 않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라이펜타도 그렇습니다. 착용감과 소리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생각 같아서는 하루 종일 듣고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착용감은 차치하고, 라이펜타의 편안한 음색이 경우에 따라 장점이 될수도 혹은 단점이 될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보통 두 가지 상황에서 음악을 듣습니다. 하나는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때, 다른 하나는 음악과 함께 다른 일을 할 때입니다. 라이펜타는 후자의 상황에 보다 잘 어울리는 스타일입니다. 보통 전자는 보다 음악이 들려주는 쾌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쾌감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을 겁니다. 꽉 찬 밀도감으로 무대를 가득 채운다든지, 특정 음역대를 도드라지게 해서 집중시킨다든지, 혹은 타격감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쾌감을 위해 꼭 전반적인 밸런스를 무너뜨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밸런스가 잘 잡힌 가운데에서도 음의 밀도나 음선 표현 등을 통해 듣는 재미를 가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라이펜타는 이러한 유형과는 거리가 멉니다. 먼저 밀도의 측면에서는 무대를 충분히 활용하지만 가득 채우지는 않습니다. 항상 어느 정도 여유가 느껴지는 적당한 수준의 밀도, 그리고 무대와 객석과의 거리를 유지합니다. 음역대 밸런스는 라이펜타가 들려주는 소리 전체를 놓고 본다면 누가 들어도 밸런스가 참 잘 잡힌 소리라고 느껴질 법합니다. 그런데 이를 음역대로 쪼개어 두고 살펴보면 각 음역대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평소 제게 익숙한 음색을 기준으로 한다면 라이펜타의 중음역대는 보컬 배킹이라 느껴질 수준은 아니지만 남성과 여성 보컬 모두 음색이 살짝 밝고 가볍게 느껴집니다. 보통 V자형 음색 성향의 이어폰에서 들리는 보컬 표현입니다. 하지만 V자형이라 하기에는 저역이나 고역으로 밸런스가 과하게 치우쳐졌다는 느낌이 달지 않습니다. 저역의 경우 양감 자체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무대가 빈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채우는 중저역의 울림이 다소 밝게 느껴지는 중음역대를 보완해줍니다.
국내에는 ‘Take me to church’라는 곡이 CF에 사용되어 잘 알려졌지요. 5년만에 발매된 호지어(Hozier)의 두 번째 앨범 <Wasteland, Baby!>의 1번 트랙 ‘Nina Criad Power’라는 곡을 들어봅니다. 곡의 시작부터 등장하는 드럼 표현에서 메제의 소리 성향이 잘 드러납니다. 드럼의 타격음은 묵직하지만 부드럽습니다.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타격음보다는 이후의 잔향 표현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다소 긴 잔향으로 인해 딱딱 떨어지는 비트 표현은 조금 덜한 대신 저역이 무대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며 곡 전체를 풍성하게 아우릅니다. 곡의 후반부에는 호지어의 보컬과 함께 메이비스 스테이플스의 피쳐링, 이에 더해 코러스 보컬이 함께 등장하며 말 그대로 소리가 쏟아집니다. 다소 요란하게 들릴 수 있는, 혹은 요란하게 들리는 것이 정상적인 구간임에도 라이펜타는 안정적으로 곡을 처리합니다.
매년 이맘 때 꼭 들어야하는 노래의 주인공, 올해에는 새로 발매한 앨범 덕에 벚꽃 말고 다른 곡들을 열심히 듣는 장범준 3집은 며칠 안 되는 짧은 봄에 라이펜타와 함께 듣기 참 좋은 앨범입니다. 곡은 바뀌었지만 듣기 쉬운 멜로디와 누구나 한 번 쯤은 겪었을 법한 일상적인 가사는 여전합니다. 보컬의 음색이 조금 가볍게 들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소 제가 사용하는 비전 이어스 VE6와 비교한다면 라이펜타가 보다 무대에서 떨어진 곳에서 공연을 감상하는 쪽입니다. 단순히 보컬이 가벼우니 보컬 배킹이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보컬을 포함한 모든 소리들이 함께 일정 거리를 유지합니다. 보컬을 여성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볼빨간 사춘기 <사춘기집1 꽃기운>을 들어보면 보다 원경에서 공연이 펼쳐집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드러운 저역과 깨끗하고 담백한 보컬 표현의 매칭이 마음에 듭니다. 다만 적정 볼륨으로 들었을 때 어쩔 수 없이 무대 규모에 비해 소리가 사방으로 펼쳐지는 정도가 작게 느껴지는 부분은 있습니다. 라이펜타의 소리가 음색에 비해 뭔가 시원하게 뻗어나가지 못한다고 느끼는 분이 계신다면 아마 무대 활용력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곡의 스케일을 조금 키워봤습니다. 현 세대 OST의 선두주자를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스 짐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한스 짐머가 제작한 곡들은 단순히 영화의 배경 음악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집니다. 라이브 공연에 맞춰 관현악 곡으로 재탄생되어 전세계를 순회하며 공연이 열립니다. 특히 <The World Of Hans Zimmer>는 이전의 라이브 투어 앨범과는 달리 전자악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 오롯이 관현악만으로 연주되어 또다른 듣는 맛이 있습니다. 워낙 곡의 스케일이 크기로 유명한 한스 짐머의 곡들이기에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곡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를 다 담을 수 있는 여유로운 무대 규모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라이펜타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평소보다 볼륨을 올려서 듣기를 권합니다. 높은 볼륨이 다소 부담되더라도 동볼륨의 다른 이어폰들이 들려주는 자극보다는 귀의 피로가 훨씬 덜하게 느껴집니다. (오래 듣지는 마세요!)
라이펜타의 저음역대 표현은 들을수록 매력적입니다. 타 이어폰들보다 타격감이 유독 강하게 느껴지지도, 그렇다고 양감이 엄청 부풀어오른 것 같지도 않은데 존재감이 뚜렷합니다. 동사의 엠피리언이 들려주던 저역 표현과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사용된 기술이 다르더라도 결국 최종적으로 소리를 매만지는 일은 아마도 수장 안토니오 메제의 몫일 텐데, 이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탁월한 능력을 가진 듯합니다. 저역의 양 자체는 많지 않지만 양에 비해 부피가 큽니다. 그리고 질감이 기분 좋을 만큼 부드럽습니다. 결론적으로 한스 짐머 스타일의 곡들과 매우 잘 어울립니다. 내친김에 한스 짐머의 뒤를 이을 차세대 작곡가, 라민 자와디의 <Game Of Thrones> OST도 들어봅니다. 2011년 시즌1부터 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어느새 마지막 8번째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드라마 자체의 퀄리티도 높지만 영상미만큼 압도적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이 왕좌의 게임 OST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부터 남들에게 라이펜타를 OST용 이어폰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보통 고가의 이어폰들로 가면 음질보다는 성향에 의해 구매 여부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저도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라이펜타의 성향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라이펜타는 제가 오랜만에 만난 고급형 올라운드 이어폰입니다. 아마 라이펜타에 취향을 저격당하는 유저들을 적지 않을까 감히 예상합니다. 라이펜타는 취향을 저격당해서 듣는 이어폰이 아니라 다양한 취향의 유저들에게 골고루 추천하더라도 무난하게 만족감을 선사할 이어폰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어폰들은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지요. 매일 마셔도 질리지 않는 커피 같은 이어폰, 라이펜타였습니다.
*이 글은 셰에라자드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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