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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몸, 편한 마음

스페인 효도여행 3탄

by Lali Whale

엄마가 늙었다. 그리고 딸도 늙었다. 늙는 것만큼 재미없는 게 있을까. 재미만 없으면 다행이겠지만 늙는다는 건 재채기할 때 요실금을 걱정해야 하는 구질구질한 변화다. 13일로 예약한 기차표가 16일로 둔갑하는 원치 않는 마술을 경험하게 되는 일이고 모닝커피를 마시면 위가 아파 나잇맥주는 못 마시게 되는 김 빠지는 일이다. 무엇보다 한 명이 아프면 다 같이 아프게 되는 못쓸 도미노다.


한 명이라도 단단하면 다 같이 무너지지 않으련만 늙은 우리 모녀는 모두 감기에 걸리고 또 걸렸다. 여행 전 나의 아들로부터 시작한 감기는 나에게 들러붙어 여행 시작과 함께 엄마에게 옮아갔고 세비야에 가는 날 언니를 넉다운 시켰다. 스페인의 일교차가 큰 날씨 또한 감기를 부추기는 원인이었다. 분명 남유럽이라 따뜻하다고 했는데... ㅠㅠ 아침, 점심, 저녁의 일교차가 10~15도씨 차이가 나니 허접한 몸뚱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멋 내는 것은 포기하고 가지고 간 옷을 켜켜이 입고도 떨다 땀 흘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여행 초반에 나았던 감기가 막바지에 다시 걸렸다. 우리는 돌아가며 코를 훌쩍이고 몸살 때문에 침대를 끌어안는 신세가 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가. 여행 전에 감기에 걸린 나는 의사 선생님의 선견지명으로 약을 한 보따리 들고 왔고 우리는 의료법에 권장되지 않지만 사이좋게 약을 나눠 먹었다.


감기에 걸리니 스페인 전통 음식이고 나발이고 따끈한 국물이 당겼기에 쟁여갔던 컵밥과 라면을 매일 호로록 먹었다.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냐고 언니를 구박한 것이 무색하게 한 컵도 남기지 않고 올클리어 하고 말았다. 나 분명 빵순인데 ㅠㅠ 김치 없어도 밥 잘 먹는데 ㅠㅠ 한국인이라서가 아니가 미국애들도 아프면 영혼이 깃든 닭고기 수프를 먹는다지 않은가. 그런데 스페인에는 수프조차 차가웠다. 엄마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는 호텔을 포기하고 한식으로 아침을 주는 민박을 선택했는데 덕분에 감기환자 셋도 잘 얻어먹었다. 감기 때문에 언니는 기대하던 와인도 못 마셨고 식비도 슈퍼세이브 되어서 전체 여행 경비가 대폭 절감되었다.


어린 딸 셋을 이고 지고 다니던 체력 만땅의 엄마는 없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 화장실을 수배해야 했고, 앉을자리를 확보해야 했다. 숙소를 기점으로 중간에 들어와 쉬었다 다시 나가야 했고 힘들 것 같은 일정은 애초에 잡지 않았다. 나보다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던 엄마는 이제는 원하다고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알았다. 그것은 자신감을 잃게 하고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이 여행이 엄마의 체력으로 다소 무리일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힘들어도 지금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괜히 왔다고 힘들 때 몇 번 투덜거린다고 해도 못해서 아쉬워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보는 풍경과 이제 마지막이겠지 하고 만나는 세상은 그 감동의 밀도가 다르다.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전보다 현저히 적기 때문에 그 한정된 조건 안에서 더 밀도 있게 즐길 수 있다. 엄마가 그렇게 세상을 만나길 바랐다.


약을 먹고 컨디션이 업되면 우리는 파란 하늘의 스페인을 자유롭게 걸었다. 간헐적으로 계속 온다던 비는 오직 우리가 실내에서 플라밍고 공연을 볼 때, 그때 딱 무섭게 쏟아지고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여행 내내 스페인의 하늘은 파랗고 깨끗했다. 기온차는 컸지만, 하늘이 맑아서 보이는 모든 것이 빛났다. 아마도 가장 많이 한 말이 "날씨 너무 좋다! 하늘 진짜 예쁘다." 였던 것 같다.


4월의 바르셀로나와 세비야의 쨍한 하늘


날씨가 좋아서였나? 놀랍게도 같이 가면 반드시 싸운다는 모녀의 해외자유여행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아무도 안 싸웠고 벌금으로 틀어막은 엄마의 과거 이야기도 잘 막혀있었다. 눈치가 백 단인 작은 언니는 엄마가 삐질 것 같은 포인트를 귀신같이 알았다. 같이 칠순할매를 놀려 먹다가도 적정 시점에서 어르고 달래는 언니의 스킬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기차시간에 걸렸던 단 한 번을 제외하면 배꼽시계가 울리지 않게 엄마를 알뜰히 먹였고 힘들면 어디서든 쉬었다. 예매를 못해서 세비야에서 제일 유명한 알카사르는 벽만 보다 오고, 힘들어서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도 못 갔다. 우리가 여행을 간 주가 부활절 주간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그래서 전 유럽에서 많은 여행객이 몰리는 시기라는 것도 몰랐다.


세비야의 세마나 산타기간의 형제회 행렬

하지만 그 덕에 스페인에서 가장 장엄한 축제로 알려진 세비야의 세마나산타(Semana Santa)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온 세대가 함께, 아이부터 어른까지 지역의 모든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함께 하는 형제회의 행렬이었다. 주요 관광지는 패스했지만, 바르셀로나 골목을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로컬 마켓에서 빵과 올리브를 사 먹었다. 힘들면 종이 울리는 광장 벤치에 앉아 커피와 달달 구리를 먹었고, 공원 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보고 쉬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거면 됐지 싶다.



화요일의 감사

- 8박 10일간의 긴 여행을 크게 다치고 마음 상하는 일 없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 엄마와 언니, 세 모녀가 함께 여행 갈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 10일간 스페인이 내내 맑은 날씨여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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