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16)

16

by 작가 전우형

나는 성벽 가장자리에 앉아 고개를 내밀었다. 강보처럼 공산성을 감싼 금강은 갓난아이 어루만지듯 그 둘레를 따라 흐르며 공산성에 잠든 영혼들을 달랬다.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굽이치는 금강의 시간은 걸음이 느린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 포근함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뒤쫓는 이의 재촉하는 목소리는 저 멀리 자취를 감췄다. 나는 시간의 마차에 올라탄 채로 유수처럼 흐르는 등불에 몸을 맡겼다.


무령왕을 비추던 조명들마저 하나씩 자취를 감추었다. 원형 로터리와 한산한 광장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목덜미가 찌릿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털 끝이 곤두섰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양손으로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무릎을 당겨 안은 뒤 몸을 둥글게 말아 그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발바닥 끝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남았다. 관계없는 그 아찔한 감각이 내가 혼자라는 걸 몇 번이나 다시 알려주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나는 엉덩이를 옆으로 밀었다. 이따금씩 오가던 자동차도, 별과 바람과 빛과 밤의 소요도, 지독한 어지럼증과 한기까지. 모두 멈췄다. 시간마저.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내민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그것을 감쌌다. 향기가 코끝으로 스몄다. 커피 향기와 색깔 없는 향기. 그저 한 사람의 존재를 나타내는 향기.


가슴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에 그것은 칠레 서부에 진도 8.3의 강진이 일어났다는 인터넷 기사쯤으로 여겨졌다. 지구는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태평양판이 남아메리카 판을 밀어내며 지구의 심장부로 말려들어가고 있구나. 그럼 안데스 산맥은 더 위로 치솟을까, 도리어 가라앉을까. 10초쯤 기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눈을 치켜뜬 후에 잊어버리거나, 점심식사 자리에서 국밥을 기다리며 맞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하고 묻는 정도의 감정. 흔한 호기심 또는 자극적인 뉴스거리 중 하나.


그러나 지구 반대편인 줄 알았던 진앙은 심장 바로 아래까지 다가왔다. 그 파동은 심장을 제멋대로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한 쉼 없이 일해야만 하는 생명의 노예. 한 순간도 잠들 수 없는 저당 잡힌 발전소 직원. 분당 60에서 120번씩 온몸으로 피를 보내지 못하면 온갖 책임을 뒤집어쓰는 가혹한 일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기관. 오히려 박동에는 가속이 붙었다. 이 흔들림의 시작은 어딜까. 무엇과 무엇이 부딪치는 걸까.


생각을 뚫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나는 커피에 못 박혀 있던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굳어있던 목에서 드드득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은행잎이 바람에 날렸다. 사락거리며 데굴데굴 구르다 어딘가에 멈춰 섰다. 나의 떨림도 그 지점에서 함께 정지했다.

“금강이 알려주던가요?”

나는 말하려 했다. 모르지 않았어. 다만 말하지 않은 것뿐이지.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이 버드나무처럼 흐드러졌다. 저 아래로 가라앉은 채 목소리가 소곤댔다.

“비밀이었는데. 여긴.”


**


뻥 뚫린 하늘은 지독했다. 숨을 마셨다 내쉬면 몸이 떠오르며 순식간에 우주의 어딘가에 도달해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초침은 째깍거리지 않겠지. 그런 느낌일 거다. 비밀을 들킨 건. 누군가 나도 모르는 나의 어딘가를 마음대로 헤집을 것 같은 두려움. 나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고, 그래서 스스로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일들을 시간, 장소, 등장인물, 사건과 결과, 이전과 이후의 맥락까지 샅샅이 기록한 수첩을 매년 한 권씩 나이만큼 기억의 책장에 꽂아두는 것.


말하지 않은 비밀은 상자에 담아 화단 구석에 묻어둔 타임캡슐 같은 거다. 자신과의 단절. 과거와의 단절. 기억과의 단절. 사람과의 단절. 마음과의 단절.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나의 일부. 나는 그녀의 비밀을 안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들켰다고 생각하는 것과 내가 알았다고 느낀 게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건 도저히 좁힐 수 없을 것이다.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고, 인간은 다른 은하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짐작할 수 없는 거리는 줄이려 들수록 오히려 멀어진다. 절망의 시발점이 늘 그렇듯이.


달에 발자국을 직접 내딛을 수 없다면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연습해야 한다. 그게 더 낫다. 나는 암스트롱이 싫다. 쓸데없이 달에 발자국 따위를 새긴 탓에 나는 달토끼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척박한 크레이터로 덮인 달의 진짜 모습 따위를 원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그보다 거기 어딘가에서 달토끼가 떡방아를 찧으며 오손도손 산다는 이야기가 더 좋았다. 세상의 일부를 미지로 남기는 건 꼭 필요한 일인데. 전설과 낭만과 상상을 파헤치기 위해 지구 중력을 뚫고 우주로 날아갈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틀리거나 잘못되었다고 낙인찍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냐면 너무 많았으니까.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틀렸다고 하다가는 어떤 생각이나 주장, 추론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지독해. 끔찍해. 인간의 거짓말을 밝혀낼 수 있는 괴물은. 거짓말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나는 지금도 진실만을 말할 수 없는데. 진심을 숨겨야 유지될 수 있는 관계도 있는데. 거짓을 진심이라고 믿어야 상처받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하늘이 뻥 뚫린 탓이겠지. 어울리지 않게 저 위가 맑은 탓이겠지. 그 공간으로 무엇이든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나는 발가벗겨진 것처럼 위기감이 들겠지. 다 들킨 것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킨 건지 짐작할 수조차 없어서 수습의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의지조차 사그라들 정도로. 바싹 마른 낙엽을 밟았을 때처럼 힘을 뺄 틈도 없이 바스러지고 말 정도로.


피가 굳은 자국을 긁어서 딱지가 떨어지면. 고통은 순간인데, 아프지도 않은데. 왜 뒤늦게 피는 흐르는 걸까? 피가 옷에 묻고.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고.


공주에 대한 기억들은 가방 밑바닥에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벽돌 같은 책들에 깔리고 구겨진 사진 같았다. 비에 젖은 가방을 뒤집어서 탈탈 털었을 때 찢어진 책 표지처럼 툭 떨어질 법한 그런 알아보기도 힘든 사진. 그러나 어쩌면 화석처럼 가방의 일부로 굳어 영영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일부. 분명 살아왔음에도 내게 없었던 일로 기억될,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버젓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소름 끼치게 했다. 폐기된 줄 알았던 과거의 사진 하나가 문득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놀라게 될까, 아니면 눈물짓게 될까. 그녀라면 어떨까.


그녀라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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