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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승 Nov 12. 2016

한국인 최초 남성 무용이론가 박영인

  무용사료상의 자료로만 근거로 해서 무용이론가 박영인의 이력을 살펴본다면 1908년1월 8일  경남 울산 태생으로 부산중학교 때 영국인 선교사로부터 무용의 기본을 배운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수재들만 다닌다는  마츠에(松江)고등학교에 진학해 무용을 독학하다가 동경대학에 입학해 그 후 일본인 석정막 연구소에 입문하였고 미국인 루돌프 에폴 에게 발레의 기초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박영인의 부친은 근대 개혁파이었던 박남극(朴南極)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서울 선린학당에서 활발히 활동한 개혁파로 알려졌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낙향한 부친으로 인해 경상도 울산에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재력가 아버지 덕분에 이른 나이에 무용계에 입문한걸로 알려졌다.

  유난히 머리가 좋았던 그는 무용에만 심취해있었던것이 아니라 동경대 문학부에 진학해 미학을 배울 당시 1933년 동경대 2학년때 동경 청년회관에서 무용가로서 공연을 올린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무용에 대해서 당시 일본의 일부 평론가들은 “동경대를 나왔으면 무용도 그만한 정도는 높게 표현해야지, 머리만 크고 몸은 말을 듣지 않는 박영인의 무용은 절름발이“라는 혹평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한 잡지에서 독일로 건너가기전의 활동할 당시의 자신의 무용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말하였다.  



“ 신흥무용 - 반드시 독일무용을 뜻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무용을 말한다면 인간의 감정만이 우리의 사상까지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육체운동을 통하여 즉 육체를 표현소재로 삼은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무대상의 물체운동까지도 사용한다. "  


일반적인 무용가들과는 다른 그의 행보와 그의 특별한 재능은 일반적이지 않았기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동경대학 졸업후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일 국립 무용대학에 진학해 또다시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박영인이라 불리웠지만 일본으로 건너가면서부터는 에헤라 마사미(江原正美)라는 일본식 본명이 있었지만 박영인은 주로 쿠니 마사미라 라는 이름을 더 사용했었지만 무용이론가및 책 저술가로서의 박영인을 기억하는 가장 가까운 키워드중에 하나가 그의 한국식 필명 방정미(防正美)를 기억해 두어야할것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해방을 기점으로 도일하기전까지의 사료상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실 특별한것은 별로 없다.오히려 도일이후 일본정부의 도움을 받아 독일 베를린으로 넘어가 세계무용사에 이름을 남긴 루돌프 반 라반이나 마리 뷔그만 등의 예술가들과의 교류나 영향을 받아 독일식 신흥무용을 배웠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주로 유럽에서 활동한 일본인 무용가로서 소개되곤 했었는데 한국과의 인연이 단절된 결정적인 시기는 아마도 광복이후로 추정되어진다.

  결혼도 안 하고 무용에만 심취해있던 그는 일본에 자신의 예명을 딴 쿠니 무용연구소를 열었고 일본의 교육무용의 발전에도 큰 이바지를 했지만 결국 그의 노년은 1955년쯤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L.A 신무용극장의 책임자로 건너가게 되었고 뉴욕과 로스엔젤레스를 왕래하다가 1964년부터는 미국 플러튼 주립대학의 무용과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박영인이 일본에서 어느정도의 무용가와 무용이론가로서의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미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피폐한 경제사정 때문이었다는것이 거의 정설이었던걸로 보여진다. 결정적으로 한국인이었던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하여도 그의 제자들은 식민지 출신의 스승에게 무용을 배우지 않겠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전해져서 그가 겪은 마음의 고통도 꽤 컸었던걸로 보여진다. 그는 식민지 시절에 태어난 국민으로 안고 살아야하는 삶을 늘 불운하게 여겨서인지 언제나 193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며 살아왔다고 전해진다. 태생적 한계에 대한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이 단어에 굉장히 집착하고 그에 맞게 살려고 했었으며 자유로운 예술가로의 삶을 지향하던 그를 가장 압축적으로 잘 나타낼 수 있었던 2번째 키워드가 아닌가 싶다.

  박영인은 서양무용의 기초를 배우고 1930년대부터 외국춤을 배우며 특히나 독일의 신흥무용에 심취했던 그는 자기의 이론을 따라 안무하고 추는 춤, 즉 음악없이 하는 무용인 '무음악무용'에 특히 주안점을 두었던거 같다. 위의 글에서 나타난 바와같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무용은 인간의 감정만이 아니라 사상까지도 표현하는 것으로 우리가 행하는 육체운동을 통하여 육체를 표현하는 소재로 삼은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대상에 물체운동까지도 사용한다고 하였다는 논리로 결론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무용론(舞踊論)이란 이시이 바꾸가 주장하는 무용시도 아니요 독일식 무용인 신흥무용에 근접하고 있음을 사사해주었다. 그러나 박영인이 신흥무용이라는 용어정립까지 칭하며 말하고자 하는 신흥무용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작품을 보지 않고서 그 내용을 헤아리기는 어려운 것이나 아마도 사료(史料)에서 나타난 그 의미는 무용가 자신의 작품에 나타난《1930년대》,《인간의 시》등을 놓고 살펴보면 제목에서와 같이 다분히 추상적인 것이인 것이 대부분이었고 박영인 자신은 이지적인 무용을 선보이길 원하였지만 그것은 마음과 다르게 표현되어진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일본 동경대학교 문학부에서 미학을 전공한 그는 앞서 말한 최승희와 조택원의 스승인 이시이 바꾸에게도 사사하였고 1933년 동경대 2학년 때 공연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동경대학교 출신의 학생이 무용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탐탁지 않아하는 이들이 많았고 특히나 헌법을 강의하는 교실에서 춤을 췄다'는 이유로 헌법학자인 미노베 타츠키치(1873~1948) 교수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무용연구소 시절의 박영인- 왼쪽 맨 끝에서 5번째 사진속 인물이다.-사진출처:구글


  일본에서의 유학생활이 끝나갈 즈음 박영인은 일본 정부의 도움으로 독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미 독일의 표현주의 무용에 흠뻑 빠지면서 모던댄스 계열의 춤에 누구보다 관심이 있었던듯하다. 

  독일에서는 루돌프 반 라반과 마리 뷔는구먼에게 독일식 신흥 무용을 배웠고 이후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 베를린 국립극장을 비롯해 이탈리아 및 헝가리 등의 유럽 각국에서 24회의 공연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의 활동에 대해서 국내 신문에서도 다룬 기사들이 있는데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에서 박영인의 공연 소식을 전하기도 하였고 1937년 5월 7일 조선일보 기사에는 3월 초순 독일 베를린에서 일본 무용가 방정 씨가 조선 농부의 춤을 특이한 무용으로 올려서 베를린 시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그는 일본인으로 완전히 귀화하여 쿠니 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제국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고 1948년 동경 유라쿠 조에서 공연된 한일 합동 오페라 "춘향"의 안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공연에서 그는 우리나라 전통춤을 바탕으로 창작한 공연을 올렸으나 이 공연 이후의 그의 정확한 행적은 알기조차 힘들다. 무용평론가 및 무용 교육자 무용교육의 기틀을 다잡은 그였으나 사실 그의 입을 통해서 정확히 전해진 진실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저 사료에 의존하여 정리하는 것이 그를 기억하는 전부의 기억이 될 것 같다.

  일본을 시작해 유럽에서의 활동을 한 후 마지막으로 그가 거처로 정한 곳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이었는데 캘리포니아에 그는 자신의 무용연구소를 다시 마련하였고 195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미국을 오가던 그는 1961년에 교육무용일본연구소를 제자들에게 맡겨두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무용극장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다시 미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당시의 미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새로의 예술사조가 형성되어가고 있었고 박영인은 뉴욕 뉴스쿨 대학의 무용과 주임을 하다가 1964년부터는 캘리포니아 주립 플러튼 대학 무용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으며 이후 일본에서는 교육무용 연구소장을 맡았고 미국에서는 쿠니 댄스 파운데이션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의 활동을 중간에 접고 그가 도미한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정확하진 않지만 일본의 피폐해진 경제사정이 가장 유력하였고 당시 활동하던 예술가들 사이에서 가장 유행하였던 '코스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세계시민주의)'이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의 활동 당시에도 제자들 사이에서 그가 한국인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리 좋은 꼬리표가 아니었기에 그 사실은 무용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했던 무용은 신흥 무용이라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그의 무용의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겠다. 또한 박영인이 독일에 머무르는 동안에 행한 업적 중에 예술사적으로 높이 평가해야 될 일 중에 하나가  무용 서적을 저술하는 것이었으니 그때 저술된 연구물이 바로「무용예술의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전 11장에 이르는 이 책의 내용은 무용 발달사, 예술 무용론, 신흥 무용론, 현대무용 작가론, 무용 반주음악, 무용보, 무용교육, 무용 비평 등 광범위하게 내용을 다루었을 만큼 무용이론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풀이해 놓았다. 그만큼 그의 업적은 무용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나 이 책은 일문으로 만들어져 일본에서만 발표되었을 만큼 박영인은 방정미(邦正美)라는 예명으로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무용이론가일 뿐이었고 게다가 독일에서의 활동 역시 1938년 11월부터 동양인으로는 드물게 독일 국립 무용학교에서 아세아 무용과를 특설해 강사로도 활동할 만큼 무용사적으로 다양한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박영인이 기존에 무용사적으로 보여준 모습의 이면에는 해방 직후 고향에 잠시 들렀어도 과거의 자신이 친일파로서 행한 행위들로 인해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당시의 분위기를 잠시 피하기 위해 일본에 출국한 것이 고국과의 마지막 인사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탁월한 무용이론과 무용평론을 발표하며 또한 직접 춤추는 창작 무용가로서 인정받을 당시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지성적으로 美를 구성하는 신흥 무용가 박영인 씨’라는 제하의 기사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박영인은 방정미(邦正美)이란 일본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무용가이다. 동경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한 사람으로…(중략) 처음에는 무용가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무용비평가를 지망하였던 것이다. …(중략)  그리하여 석정 막 문하에서 수년간 기초를 닦고 당시 미국 무용가 폴 레스트 가 바트와 아돌프 에볼 양인이 동경에 온 것을 기회로 다시 그들에게 발레의 정확한 기초를 배운 것이다. 그러자 제대를 졸업하던 해 비평가보다 무대에 올라서고 싶은 야망이 그로 하여금 제 1회 발표회에서 ≪창세기≫, ≪세기말≫, ≪정석 분석≫ 등 신흥 무용의 처녀작을 내놓게 한 것이었다. 현재로 백림에서 보드 뷘졀 무용학교에서 연구 중이나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이 동경에 있어서도 가장 신흥 적인 무용을 보여 준 사람이었지만 그가 가진 기초적인 기교가 자기가 두뇌로 생각하는 정신적인 구성에 비해서 빈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중략) 씨의 작품 ≪1930년도≫, ≪인간의 시≫ 등 제가 표시하는 바와 같이 …(略) 다분히 추상적인 표현을 가진 것이었다. …(중략) 허지만 우리가 고전무용을 보지 못하고 대번에 반역적인 무용을 본다고 해서, 혹은 박씨의 무용을 비 대중적이라고 해서, 비난할 것은 못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략)   


라고 평해졌다. 

  위의 기사대로 박영인의 경우, 처음부터 그 스스로가 무용가가 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무용비평가를 원했던 것인지는 그의 입을 통해 들은 바 없어서 확인이 불가하다. 또한 그가 스스로 주창한 신흥 무용이라는 것도 작품을 통해 보여준 부분이 미약해서 그 부분에 대한 이해도 쉽지 않다. 

순수한 창작무용가로서 또한 무용이론가로서의 일면은 묵과되어서만은 안 되겠지만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시대적으로 불운하고 어두웠던 시절에 엘리트적 성향으로 앞서 경험한 외국 유학과 일찍 히 받아들인 선진문물에 대한 경험에 대한 결과물을 내 조국을 위해 쓰기보다는 국내적으로는 단 한 번도 활용하지 못하고 국외적으로만 활동한 일면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창작무용가로서의 인정받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무용가로서의 활발한 활동과 무용이론가로서 남긴 비평작업만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꼭 무용을 했던 사람으로서 무대에 서는 것만이 정답으로 남긴 전형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아주 좋은 선례라 할 수 있다. 박영인의 무용 저서로는「무용 개설」,「창작무용」,「교육무용 원론」,「무용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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