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홍지승 Dec 23. 2016

무용가 김민자의 이야기

-최승희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던 무용가-

  1916년 태어난 김민자의 본명은 김우경 (又璟)이었지만 14살인 경기고녀(현 경기여고)2학년 때 최승희 무용연구소에 입문하여 무용활동을 시작해 1930년 11월 14일 자선무용공연회(慈善舞踊公演會)의 일원으로 출연해 공회당에서 열린 이 공연에 출연하기도 하고 1931년 단성사무대에서는 《봄을 타는 아가씨들》등의 여러 작품에 출연하면서 박외선과 같은 어린 무용수로서 활동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스승 최승희가 지어 준 와가구사 도시꼬(苦草敏子)라는 일본이름으로 인해 김민자(金敏子) 라는 예명을 갖게 된 그녀는 이후 무용계에서 김민자로 활동하였는데 훗날 김민자의 증언으로는 자신에겐 일본인 이름으로 활동해야 인기가 많다고 말하던 최승희의 뜻에 따라 그렇게 활동을 했지만 정작 최승희의 속내는 자신만이 한국인의 무용수로 비춰지길 바랐던 거 같았다고 증언 했다고 한다. 

 그렇게 김민자의 실질적인 무용인생의 시작은 1932년 3월6일에 최승희를 따라 동경으로 가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집안을 왈칵 뒤집어 놓고 집안과 거의 단절하다시피 떠나야했기 때문에 동경의 이시이 바꾸 문하에 까지는 갔으나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아서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그 집안의 일을 봐주고 배우는 일본식 개념의 제자로는 있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연구생들에 비해서 월사금을 내지 못해서 뒤에서 보면서 지켜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날이 많아서 일본에서의 고된 삶으로 인해 김민자가 우는 날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김민자에게 모든 것을 걸 정도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던 탓에 스승 최승희 역시 자신의 딸 안승자(安承子, 1932~?, 예명 安聖姬)의 뒷바라지를 맡길 정도로 김민자를 신임하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최승희의 제자로 입문한 김민자는 남자무용수를 키우지 않았던 최승희의 파트너가 되어 《코리아 환상곡》에 출연하기도 했고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맞을 정도로 신임을 받던 제자였다. 그러나 김민자가 그만한 고생을 하면서 기다린 이유는 물론 자신의 무용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지만 정작 최승희는 그런 김민자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신의 활동에만 주력했다. 물론 김민자 역시 가정부처럼 온갖 고생을 다했던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여덕(餘德)에 힘입어 최승희가 국내외 공연을 성황리에 끝낼 수 있었고 최승희가 가정에 신경을 쓰지 않고 무용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면 하는 제자로서의 마음이 앞서던 것도 사실이었으니 전적으로 김민자의 희생만을 놓고 보면 김민자는 진정 한 사람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은근히 바랬던 시간이 오지 않고 점차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김민자는 초조해 지기 시작 한 것이다. 

 아마도 김민자는 무용가로서의 입신을 위해 김민자도 처음엔 1년 정도를 예상했기에 참을 수도 있었고, 참고 있노라면 무엇인가 보답도 있을 것이라 믿으며 최승희의 지시를 기다렸을 가능성이 컸을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다시 3년을 바라보게 되어도 스승 최승희가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자 김민자는 그녀가 일고의 여지도 없이 조택원 귀국공연에서 파트너가 되기를 승낙한 것도 말하자면 그동안 억눌린 감정에 대한 소외자의 설움과 분노때문이라는 추측이가능한데, 당시의 상황으로는 스승의 승낙 없이 무대에 나가는 것은 일종의 배신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조택원이 김민자를 충동한 것은 예정했던 당시 활동 중인 박외선 이 마해송의 부인으로 들어앉은 이상 자신의 공연에 당장에 발등의 불을 꺼 줄 대역은 김민자 밖에 없었다는 다급한 사정도 때문이었다. 또한 최승희 라면 후에 말해서 이해 못할 리 없다고 판단한 조택원다운 성격과 이해 때문이었고 무대에 올라 자신의 춤을 추고 싶었던 김민자는 스승인 석정막을 찾아가 허락을 얻지만 그 일로 인한 최승희와 김민자 사이엔 결별의 기운이 돌았고, 결국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최승희와의 관계도 소홀해지게 된 후 김민자는 결국 구라파공연을 다녀온 스승인 최승희에게는 ‘무단출연을 했다’라는 꾸지람을 듣고 결국 결별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김민자는 조택원의 귀국공연을 통해 상대역으로 호평을 받아서 1940년에야 무용수업 11년 만에 서울에서 자신의 개인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12월 17일 매일신보의 후원으로 부민관에서 하룻밤만 열린 이 공연에서는《검무》,《비가》,《인도아가씨》,《수초소실》,《초가삼간》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이 공연을 본 평문은   

“ 무희로서 먼저 좋은 육체를 얻었다. 기교를 10분후 마스터 한 후에 바야흐로 일가를 이루려 한참 물오른 시절에 들었다(중략)․․․․김민자의 조선춤은 허리를 쓸 줄 아는 까닭으로”․․  호평 하나와 “최승희의 결점만 모아서 집대성시킨 공연”이라는 악평 두 가지로 남아있다. 



  김민자는 이렇게 많은 기대와 호평과 악평을 한 몸에 받은 무용가 이었고 그의 만만치 않은 수업경력 또한 믿음직하였으나 그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 좋은 작품을 내지 못해 실질적으로 늘 다른 사람의 상대역으로 더 많이 활약했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김민자는 이후 조선악극단에 안무 작업에 손대기 시작하였다. 조선악극단에서 만든 레뷰작품으로는《낙화삼첨》,《홍장미의 꿈》등을 만듦으로서 앞서나온 배구자 같은 길을 걸은 셈이었다 배구자와 다른점이 있다면 최승희라는 대가에게 전문적인 무용수업도 받았고 이시이 바꾸의 문하에서도 지낸 경력과 조택원의 상대역에 출연하는 등 나름대로 앞날이 촉망받던 무용수 이었으나 결국 조선악극단의 활동을 함으로서 제대로 된 제자를 길러내지도 못하고 예술성의 부재를 지닌 불운의 무용가로 주목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체 결국 김민자는 이 조선악극단의 안무자로 전전하며 순수 무용예술 무대와는 인연을 끊게 되었다. 

 한국발레사적인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1937년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에 나서자 김민자는 홀로 도쿄(東京) 무용연구소를 운영했다. 2년 뒤 1939년 한국으로 귀국해 서울 발레연구소를 설립하고, 40년엔 개인 발표회를 여는 등 최승희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 행보에 나섰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무용가로서의 인정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용가 김민자를 무용사학적인 면에서 볼때,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자신만의 몸짓으로 표현해낸 춤꾼으로서 한국 근대무용의 최초 전문 무용수이자 서울 발레 연구소를 설립한 점 무엇보다 신 무용가인 조택원과 2인무로 스포트 라이트를 받기도 한 그녀 이지만 중년이후의 삶은 다소 불행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6.25 전쟁으로 인해 당시 검사이었던 남편이 납북되면서 홀로 남겨진 상처가 컸다고 한다.

 1960년대 들어서 조선악극단, 예그린악극단 등에서 안무를 했지만 명성에 비해 활동은 미미했고 존재감이 있는것도 아니었다.이에 대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성기숙 교수는 “광복 이후 송범·임성남 등이 한국 무용계 주류로 발돋움하면서 김민자는 구세대가 됨으로서 무용계 주도권 싸움에서 뒤쳐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무용사적 관점에서 볼때 김민자는 최승희와는 동시대에 무용을 했던 예인이었지만 뜻밖의 예술의 도제식 교육에 입각해 스승과 제자라는 미명아래 걸린 악연으로 인해 한 명의 불세출의 무용가로 칭송 받고 기억되고 있으며 또 한 사람은 불운한 무용가로서 빛도 보지 못한 체 40여년 넘게 숨어지내다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무용평론가 안제승의 의견 역시 김민자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맨 처음 토슈즈를 신을 줄 알았던 김민자의 무용 생활은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 쓸쓸히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했는데 이런 경우를 보면 인생도 아이러니 하지만 예술사 또한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런 아이러니한 일면들이 있다는걸 알 수 있기도 하다.

  이렇듯 무용가 김민자의 삶은 일반인의 삶으로 변화되어 1970년대쯤부터 불교에 귀의, 서울 종암동 영산법화사에서 40여년간 불자로 살았지만 무용수 시절에 조명에 각막을 다친 휴우증으로 한 쪽 눈을 실명했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반대쪽 눈도 거의 보이지 않아 무척 거동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그녀는 100세를 앞둔 얼마의 나이를 둘 만큼 장수의 삶을 살다가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2012년 11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무용가 김민자님의 글은 한국 신무용사의 저자인 故 안제승님의 글에서 여러 부분이 발췌되어 만들어졌음을 밝혀 드립니다. 각주처리 자체가 되지 않아 이렇게 알려드립니다.

출처: 한국예술사업서 1985년판IV. 대한민국 예술원. 한국 연극 무용 영화사. 안제승 


이전 20화 한국인 최초 남성 무용이론가 박영인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아는만큼 보이는 한국 발레의 역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다른 SNS로 가입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