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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연 Dec 13. 2022

만년필로 글을 씁니다.

요즘 시대에 누가 만년필을 쓰냐고 물어보신다면.

취미를 물어보면 잠깐 고민합니다. 여가 시간이 생기면 카페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운동이나 바느질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그중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취미를 하나만 꼽으라면 만년필로 글을 쓴다고 말합니다.


만년필을 쓴다는 건 곧 손으로 글을 쓴다는 말이 되겠죠. 이 취미를 고백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진득하게 손글씨를 쓴 게 언제였는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게요. 우리는 손글씨를 쓰지 않아도 불편함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메모지와 펜을 꺼내기보다  키보드나 스마트폰 자판을 이용하여 기록하는 게 익숙합니다. 어쩌다 손으로 글을 쓸 때도 스마트 펜을 사용하여 그 흔적을 전기 신호로 남깁니다. 편리합니다. 보관할 때 훼손될 걱정도 없고 찾아보기도 쉬워요.

그런데 저는 전기 신호가 되어버린 제 생각과 마음에 정이 잘 가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닌 글씨체로 쓰인 제 문장을 읽고 있자면 낯설기도 합니다. 분명 내가 쓴 말이긴 한데 내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손글의 형태로 생각을 남기는 행동에 의미를 두나 봅니다.

제 글씨는 자랑스럽게 보여줄 만큼 명필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삐뚤빼뚤 가지런하지 않고 종종 날아가기도 합니다. 한때 필체를 고치려고도 해봤지만 잘 안되더라고요.

이제는 이게 제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씨체에 신경 쓰지 않고 손글을 쓸 때 가장 솔직해집니다. 가지런하지 않은 글자에는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꾸밈없이 담을 수 있거든요.

블로그에 올리는 짧고 긴 글은 대부분 만년필에서 시작합니다. 정리되지 않은 솔직함이 읽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퇴고할 때만 키보드를 사용합니다.


손글에서는 나도 모르고 있던 마음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저는 손가락에 자아가 따로 있다고 믿어요. 손글을 쓸 때면 머릿속으로 생각한 문장을 활자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손이 갖고 있는 그 만의 생각을 펜으로 써 내려가는 느낌이 듭니다. 손에게 직접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죠. 저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니 머리가 가벼워집니다.

저는 손글로 쓸 때 가장 진솔한 마음을 기록할 수 있어요. 펜촉과 잉크 그리고 오른손이 합작하여 문장을 제멋대로 써 내려가는데, 나도 모르고 있던 마음이 짠하고 나타납니다. 마치 솔직한 마음을 손이 알아차리고 있었던 거 같아요. 경험상 머리로 하는 생각보다 손글이 저의 속마음을 더 잘 말해주더라고요.


손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제 생각을 풀어나가는 데 키보드는 너무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편리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생각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생각들은 아무렇게나 감아놓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어요. 글을 쓰기 위해서 그 생각을 한 올씩 정성스레 풀어냅니다. 그리고 씨실과 날실을 하나씩 천천히 교차하여 탄탄한 글을 만들고자 공을 들입니다.

세심하게 생각을 풀어나가기에 키보드의 속도는 저에게 너무 빠릅니다. 키보드로만 쓴 제 문장을 읽다 보면 생각의 흐름이 정리되지 못해 중구난방이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고 싶은 말을 찬찬히 곱씹지 못해, 얼기설기 꿰매어 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쑥불쑥 떠오르는 크고 작은 생각을  되도록 손글의 형태로 붙잡아 두려고 해요. 고속버스에서 본 밤하늘의 북두칠성도, 친구들의 대화 속에 느꼈던 깨달음도, 갑자기 길어진 가을 날씨에 대한 궁금증도 나에게 보내는 카톡에 중심 단어들만 써놨다가 시간이 되면 손글로 풀어나가요.

책에서 읽은 인상 깊었던 문장들도, 유튜브에서 마주한 좋은 말도 언제든지 손글로 남겨두고자 항상 만년필을 끼운 작은 공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이쯤 되면 손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설명, 혹은 영업이 성공적이었을까요?

그럼 이제는 만년필 차례입니다.

만년필은 효율성이나 편리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필기구입니다. 볼펜은 200원이면 구매할 수 있지만 만년필은 잉크 없이 펜만 구매해도 가장 저렴한 게 만 원 정도이고, 백만 원이 넘어가는 명품 만년필도 종종 보입니다. 펜 외에 잉크도 필요하고, 주기적으로 세척도 해야 해요. 아끼는 펜일수록 흠집이 생기거나 떨어트리지 않도록 항상 노심초사합니다.

만년필용 종이도 따로 있습니다. 일반적인 종이는 펜촉의 잉크가 닿으면 번져서 제대로 글을 쓸 수 없거든요. 매끈하게 코팅된 비싼 종이에다가 써야 해요. 이렇게 나열해 보니 만년필이 비효율적인 필기도구라는 건 확실하네요.


불편함을 감내하면서도 만년필을 쓰는 이유가 허세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 고백하자면, 만년필을 쓸 때 저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을 즐긴 적이 있긴 합니다. 쑥스럽네요.

하지만 본질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푹 빠져버린 만년필의 가장 큰 매력은, 글을 쓰는 순간의 감상을 증폭시킨다는 거예요.

글을 쓰기 전에 내 취향의 필감과 디자인을 가진 만년필을 고르고, 좋아하는 잉크를 충전합니다. 그렇게 준비된 세상에 하나뿐인 펜으로 내 생각을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 그 행위 자체가 글쓰기 경험을 그 무엇보다 충만하게 합니다.

만년필마다 굵기, 필감, 잉크의 흐름 등 우위를 가를 수 없는 고유의 개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분에는 어떤 만년필과 잉크를 사용할지 선택하면서 더욱 다채로운 글쓰기 경험을 즐길 수 있어요. 어쩔 땐 단지 만년필을 쓰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노트를 꺼낼 때도 있습니다.

이제 저는 만년필을 사용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건지, 글을 쓰기 위해 만년필을 사용하는 건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 둘을 구분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년필로 글을 쓰는 순간 자체를 만끽하고 있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잉크와 만년필로 문장을 써 내려갈 때, 그 문자들이 오롯이 내 것이 되는 기분을 여러분도 느껴보시면 좋겠어요.


최근 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그 일환으로 글을 많이 읽고, 또 쓰고 있어요.

만년필로 글을 쓸 때면 외롭지 않아요. 모든 감각들이 내 마음에 집중하는 시간이거든요. 내 마음을 세심하게 살핀 뒤 한 글자씩 천천히 글자를 써 내려갈 때면, 저와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다 쓴 글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를 꼭 끌어안아주는, 완전한 이해를 받곤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혼자서도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손으로 글을 써보는 경험을 권해 봅니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아요. 처음 몇 분 동안은 내 글씨가 낯설고 펜을 쥔 손이 신경 쓰일 수 있어요. 잠깐만 참고 한 획씩 천천히 글자를 써내려가봅시다. 어느새 어색한 시간이 지나가고 글쓰기에 몰입해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겁니다. 그렇게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하고 나면 복잡한 생각에 가려져 있던 진심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만년필이 궁금해지셨다면 파이롯트 회사에서 나온 카쿠노 만년필을 추천드려요. 가격은 만 원 내외인데 값비싼 만년필 못지않게 품질이 좋아요. 만년필은 펜 촉 굵기를 고를 수 있어요. 얇은 순서대로 EF, F, M촉인데요. 각각 하이테크 0. 25, 0.3 , 0.5에 대응된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거예요. 사각사각한 얇은 필감을 좋아하시면  F촉, 부드러운 필감과 잉크의 흐름을 즐기고 싶으시면 M촉이 맞으실 겁니다.


제 좋은 경험을 영업하고자 존댓말로, 부드럽게 써봤습니다.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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