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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앙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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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샤인 Dec 11. 2022

대선에 패배한 날 쓴 일기

한국 교회를 비토 하다

대선 결과가 나온 날 쓴 일기다.

안 그래도 신앙적으로도 흑화의 정점을 찍을 때였는데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에게 패배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충격을 어떻게든 소화하기 위해 펜이 가는 대로 휘갈긴 일기이다. 매우 거칠고 격양된 글이다. 신앙을 회복하지 않았으면 공개할 일이 없었을 일기이지만, 이렇게 절망하던 시기가 있었음을 기록 차원으로 남겨둔다. 혹 동일한 시기를 지나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2022.3.9 (수)


대선에 패배한 날


솔직히 1-2% 차이로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민주진영 사람들의 절박감, 그리고 막판의 여성 결집이 승리의 드라마로 이어질 것이란 생각이 확고했다. 만약에..라는 생각 자체가 너무 끔찍해 피하려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치는 현실임을, 냉혹한 욕망의 결정체임을 이번 대선을 통해 제대로 배웠다.


247,077표 차이. 역대 가장 적은 표 차이다. 장점이라고는 지지자들조차도 댈 수 없는 후보가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이 되었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아 눈물도 나지 않는다. 정치경험 무, 가족 비리 포함한 자신의 비리까지 범죄로 점철된 검사, 무속과 신천지와 깊은 교류를 하는 자, 특권층에만 머물렀어서 서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후보가, 가난과 배고픔과 중노동의 굴레에서 이를 악물고 탈출해 자신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걸어온 후보를 이겨버렸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무기력하다. 허무하다.


무엇이 문제였나.

언론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윤석열의 실체를 고발한 기사들은 포탈이 숨겨주고 반대로 이재명의 어떤 흠이라도 파헤치고 고발하는 기사는 띄워주었다.

민주당. 거대 여당이라는 의석수에도 국민이 원했던 개혁과 민생을 챙기지 못했다.

코로나. 방역엔 성공했지만 자영업자들을 돌보지 못했다. 국가부채 걱정하느라 죽어가는 국민을 버렸다.

이재명 악마화.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에 이재명은 아니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이념갈등. 여전히 색깔론은 건재하다.

국민의 수준.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대안 언론이 있음에도 자신의 집값, 자신의 감정, 자신의 욕망에만 투표하는 국민의 수준이다.

교회의 타락. 교회의 실패다. 아마 이 얘기를 쓰고 싶어 펜을 잡은 것 같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에클레시아,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무엇을 믿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창조의 원형으로 회복시키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내 안에, 이 땅에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하려 하심을 믿는다.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약한 자를 돌보고 이 땅에 공의를 세우는 것, 억울하고 슬픈 이들과 연대하는 것 아닌가.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가? 이번 대선만큼은 아니었다. 약한 자를 혐오하고, 분열시키며, 복수를 주장하는 후보에 대해 저항하기는커녕 한 몸이 되어버렸다. 무속과 이단이 결탁되어있는 것을 알고도 애써 외면했다. 선지자적 목소리는 고사하고 진정 약자를 생각하는 후보가 누군지 분별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전도축제, 새 생명축제엔 그리 열심이면서 정작 이웃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정치엔 무지할 뿐만 아니라 게을렀고 이러한 문제 인식도 없었다.


새벽기도. 기도 가운데 정녕 하나님께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가? 나의 이념과 생각을 공고히 할 뿐, 나의 믿음 좋음을 증명하는 수단일 뿐, 정말 사람을 변화시키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가?


예배. 감동적인 찬양과 설교가 종교적 카타르시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설교 가운데 선지자의 목소리는 어디 가고, 무지성과 자의적 해석이 하나님 말씀으로 포장되는가.


전도. 교회에 데려와 예수님을 소개하는, 또 다른 종교인 생성밖에 또 뭐가 있는가.


헌신. 교회 조직에 충성하는 좋은 핑계.


교제. 코이노니아. 교회에서 하나님이라는 애매한 공동 목표 하에 이루어지는 모임. 성경공부와 자아성찰은 있을지 몰라도 거기까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무엇이 진짜 선과 악인지에 대한 논의는 없고 적당한 성경 지식이나 깨달음의 공유와 인간적 교제뿐이다. 그리고 난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가.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목회자들이 지성과 사회인식, 역사인식, 철학이 부족하다. 더 넓게는 한국 신학이 사적으로 소비되는 것에만 집중했다. 개인의 영성, 혹은 공동체의 영성에 집중했지만 정작 그 '영성'에 대한 정의가 없었다. 아, 사단이 바로 이것을 노린 건가? 능력 없는 경건. 사회의 문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인식하더라도 지적할 용기도 없는, 그러한 '영성' 말이다.


질문하지 않는 성도. 목회자의 잘못된 지도가 일차적 잘못이겠지만, 자신의 삶이 변하질 않고, 내 주위,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신천지와 내가 믿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어떤 기준으로 옮음을 판단하는가. 성경은 열매로 판단한다고 했다. 열매가 있는가? 불의에 저항하고, 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가, 아니면 그러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 뿌듯해하는 것으로 끝나는가.


모든 교리는 성경에 기초하는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어떻게 확신하는가. 반야심경이나 코란 하고 무엇이 다른가. 기도 가운데 드는 생각이 내 생각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구분하는가. 결국엔 열매다. 열매를 맺어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실제 열매가 중요하다. 그토록 외우던 사랑, 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각각의 열매가 사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까지 뻗어나가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다. 난 어떻게 해야 하며 루하에게 어떤 신앙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일까.


왜, 왜 하나님을 부정하는 김어준이, 유시민이, 이동형이 믿는 자들보다 더 용감하게 거대 악에 맞서는 것인가. 왜 교회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싸우기는커녕 악과 연대하는 것인가. 회의감이 든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하기는 한 것인가? 천국 보험을 제외하면? 김요한 목사님 같은 소수의 믿음의 선배가 없었다면 진작에 저버렸을 신앙이다.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는 거니까.


나의 하나님을 내가 아직 못 만난 것일까, 아니면 나 혼자 제대로 만난 것일까. 길을 잃었다. 교회가 정답인지도 모르겠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은 하는지, 아니 애초에 하나님이 명확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신지조차도 이젠 모르겠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막연한 가이드가 있지만 내 생각이 더 많이 작용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이제 작동한다. 공동체의 중요함을 알지만, 그저 같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자신들의 이념을 서로 강화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께서 직접 길을 내주실 때인가 보다.


막다른 골목이다.

혹은 낭떠러지던가.







참고로 신앙의 방황기를 끝낸 기록은 여기에: https://brunch.co.kr/@hihogyu/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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