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앙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샤인 Dec 07. 2023

위의 것을 추구하라

골로새서 3:1-11

교회 순에서 매일 돌아가며 큐티 묵상을 나누기로 했다. 다들 한 두 문단 정도로 짧게 나눠주시길래 부담 없이 오늘 묵상을 적는데.. 이게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나도 내 언어로 정리를 한번 해야 했던 '육적인 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개념을 모두 담은 본문이어서 계속 길어지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이 긴 묵상을 한 번에 올리면 단톡방에 테러를 하는 것 같아 아예 브런치에 남겨 놓고 간단하게 링크를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종종 이 글을 다시 들쳐볼 수도 있으니까.




오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며 핵심은 ‘위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명확히 나와있진 않지만 거기엔(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1절) ‘위’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위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것들, 즉 영적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에 있는 것 = 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묵상하다 보니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라(2절)'는 오늘 말씀이 로마서 8:5 말씀과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로마서 8:5


동일한 맥락으로 난해해 보이는 오늘 본문의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라(5절)’는 말씀 또한 로마서 8:13으로 해석이 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로마서 8:13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오늘 본문은 로마서 8:13의 골로새서 버전인 것이다: 위의 것(영)으로 땅에 속한 지체(육신에 속한 몸의 행실)를 죽이라는 것.



인간은 영과 육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이분설). 예수님이 없는 자는 이 영육 모두 죄 가운데 거하며 사단의 통치 가운데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며 이것은 나의 영이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서 우리의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영적인 변화이다.


문제는 나의 육신은 여전히 이 세상에 속해 있으며 옛 자아(롬 6:6)의 본능이 남아있다는 것. 바울도 이 모순적인 자신의 존재 때문에 탄식하지 않았는가 (롬 7:24).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간단하게(?) 몸의 행실을 죽여버리면 된다고 말한다(롬 8:13, 오늘 본문 5절). 하지만 실제로 몸의 행실을 죽여보려고 했던 사람은 이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 것이다. 죽여도 죽여도 살아나는 좀비 그 자체니까.


'내가' 주체가 되는 이상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면 가능하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믿음’이라고 썼다가 ‘선포’로 바꿨다. 믿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유는 밑에 나오는 사단놈 때문)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생명이신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된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옛 본성에 찌든 정신과 육신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인 것이다.


하지만 사단이 이것을 가만둘 리가 없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것이 실패할 경우 플랜 B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생명에 연결되지 못하게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함으로. 소위 '거짓 자아' 작전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다 진노의 자녀들이었다(앱2:3). 하지만  문제는 앞서 적었듯이 새롭게 된 영을 미처 따라오지 못한 우리의 정신과 육체이다. 사단은 이 점을 간파하고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이 바로 나'라고 인식하게 한다. 나의 참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인데 나의 생각과 행동이 나라고 하는 '거짓 자아'를 내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생명과 능력은 전기(electricity)이며 우리 각 사람들은 하나님이 각자의 목적으로 창조된 가전제품들이다. 가전제품들의 콘센트가 소켓에 꼽히면(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전기가 가전제품으로 흘러가고 그 기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사단은 '거짓 자아'라는 가짜 소켓을 내밀며 콘센트가 진짜 소켓에 꼽히는 것을 막는다. 가전제품은 콘센트가 꼽혔으니 열심히 작동하려 해 보지만 전기가 통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가짜 소켓이 아닌 진짜 소켓에 연결하면 된다. 나의 행동, 나의 생각이 내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변화시킬 나의 일부분이고 내 진짜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의 죄된 본성에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적용을 해 보자면, 내가 반복해서 짓는 죄가 있다고 하자. 사단은 가짜 소켓을 내밀며 그게 원래 너야,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속삭인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단호히 가짜 소켓을 뿌리치며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라 거짓 자아야. 난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어. 그리스도께서 하실 거야! 라고 선포하면 된다. 겉으로 보기엔 정신승리 같을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단은 이를 갈며 일단 후퇴할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 영 안에 부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지속될 때 그 능력이 나의 육체를 뚫고 나올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했다. 다만 그 주체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이며 나의 이 선한 싸움을 그리스도가 행하실 것임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루하에 이어 쌍둥이를 주셨다.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당장 닥친 루하의 학교, 쌍둥이의 건강, 아내의 건강 등 근심이 시시때때로 밀려온다. 아내와 루하뿐이겠는가, 새 직장에서 맞닥뜨리는 챌린지와 인간관계의 고민, 건강 등 내면의 평안을 뒤흔드는 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해야 할 것은 '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하셨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나를 통해 나타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원받은 바리새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