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패키지디자인을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작은 패키지디자인 안에 다양한 디자인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품의 네이밍과 샐링 포인트가 되는 B.I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콘셉트의 이미지를 보여줘야 하는 비주얼은 일러스트나 포토그래피, 제품의 외형을 보호하고 패키지의 원형이 되는 지기 구조와 용기 디자인, 패키지의 전면과 후면 등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디자인은 편집디자인의 영역이었고,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콘셉트와 스토리는 디자인 기획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힘의 균형이 맞아야 좋은 패키지디자인이 되는 것이다.
패키지디자인은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을 다 섭렵하고 있어야 디자인 하나가 완성되는 복잡하고 어려운 분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키지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참 억울한 부분도 많았다.
제품의 매출에 패키지디자인이 기여하는 부분을 객관적으로 자료화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비자 조사를 해봐도 제품의 맛이 좋다거나, 성능이 좋아서 구입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고, 패키지디자인이 좋아서 지속적으로 제품을 구입한다고 말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새로운 제품을 선뜻 구입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많았다. 디자인 때문에 한 가지 제품을 계속 사는 건 아니지만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문 결과를 어떻게 객관적인 자료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같은 내용물이 들어있는 제품이라고 해도 패키지디자인의 리뉴얼만으로도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고, 제품의 매출이 늘어나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이것이 패키지디자인의 힘이 아니라면,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랜 기간 고민한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패키지디자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선택을 받게 해주는 힘'이라는 것이었다. 디자인만으로 지속적인 매출 상승에 기여하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낯선 제품을 처음 접했을 때 선택받게 해주는 힘이 바로 패키지디자인의 역할인 것이다. 즉, 좋은 패키지디자인이 지속적인 매출을 담보할 수는 없지만, 소비자들로 하여금 트라이얼을 유도해서 새로운 제품을 써보게 하고,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한 두 번 써본 제품을 계속 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제품의 몫이라고 해도 말이다.
제품 구매를 유도하는 'Kitkat'의 선물포장 디자인
그렇다면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써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일까?
물론 공짜로 제품을 준다고 하면 써보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비용을 지불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소비자들의 입장에서는 모험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샴푸나 바디워시 제품을 잘못 사면 제품을 다 쓸 때까지 가족들의 불만을 몇 달간이나 들어야 한다.
주방세제나 세탁세제와 같은 제품의 경우는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설거지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빨래의 얼룩이 빠지지 않으면 시간을 들여 같은 노동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 양념의 경우는 어떤가? 양념을 잘못 사면 온 가족이 모여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어릴 때부터 형성된 사람들의 입맛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오랜 기간 먹어오던 제품을 바꾸게 하기는 참 힘들다.
소비자들에게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제품을 바꾸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제품보다 탁월한 무언가가 있거나, 혹은 지금 사용하는 제품에 불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하게 해주는 가장 접점에 있는 것이 바로 패키지디자인이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패키지디자인이지만, 안타깝게도 기업도, 디자이너도 패키지디자인이 시장에서 얼마나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가끔 시장의 평가가 아니라 같은 디자이너들의 평가에 더 귀를 기울인다.
그중 하나가 바로 외부 디자인 기관에서 주는 '디자인 상'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다양한 '디자인 상'들이 존재한다.
나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디자인 상'들에 관심이 많았고, 상도 많이 받았었다.
'디자인 상'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우수한 디자이너라는 것을 전문가들에게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대내외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도 되기 때문에 디자이너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기업들까지도 관심이 많다. 기업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면서 경영자들도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진 것인데,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반드시 공부가 병행되어야한다. 좋은 디자인을 보는 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평가를 디자인상에만 의존할 문제도 아니다.
상 받은 디자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품이 속한 분야에 따라서는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제품들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디자인 상'은 디자이너들이 평가하는 '크리에이티브'에 해당하는 영역에 대한 우수성을 평가하는 상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상'을 심사하는 사람들은 제품의 시장 상황도, 소비자들의 생각도, 제품의 양산성이나 특성에 대한 부분에도 관심이 없다. 제품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디자인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외압과 시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가 크리에이티브를 얼마나 잘 지켜냈는가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러니 경우에 따라서는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하는 디자인이 다수 포함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패키지디자인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크리에이티브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창의성만 강조된 디자인에서 소비자는 이질감을 느끼거나, 내용물보다 불필요하게 패키지에 공을 많이 들인 실속 없는 제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심한 경우는 제품의 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어떤 분야이든 제품의 패키지 디자인을 보면서 제품을 선택해야 하는 소비자가 존재하고, 제품을 노출시켜 판매해야 하는 다양한 판매채널이 존재한다. 좀 더 미래를 생각한다면 제품의 패키지가 미치는 환경에 대한 영향력도 무시할 수가 없고, 내용물의 보호, 적재, 양산성 등까지 포함하면 패키지디자인을 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참 많다.
가끔 디자이너들은 패키지디자인은 제약 요소가 너무 많아서 창의성을 발휘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들의 창의성을 '디자인 상'을 통해 인정받으려고 한다.
디자인 상까지 받은 제품인데 양산성이 좀 떨어지는 건 대수롭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우수한 디자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소비자를 탓하기도 한다.
패키지 디자인은 제품이 없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고, 제품은 소비자가 없으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 받는 디자인이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팔리는 디자인을 고민해야 한다.
패키지 디자인은 모든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크리에이티브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는 걸 잊지 말자.
그렇지만 여전히 상 받는 디자인을 할 것인지, 팔리는 디자인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디자이너의 몫이다.
*이 곳에 실린 모든 사진들은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입니다. 사용 시 출처를 밝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