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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Nov 25. 2024

도둑맞은 내 집중력의 이유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 적당한 글감을 찾기 위해 스마트폰을 손에 쥔다.

습관처럼 카카오톡을 열어 새 메시지를 확인한다.

포털을 열어 새로운 뉴스를 읽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유튜브가 켜져 있다. 1분짜리 짧은 영상들이 눈앞에 움직이고 있다.

정신 차리고 시계를 보니 컴퓨터 앞에 앉은 이후 1시간 30분이 지나있다.

브런치 앱을 닫아도 될 만한 시간이 스마트폰 위로 흘러가 버렸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거의 하루에 한 번 컴퓨터 앞에 앉은 내가 거의 매번 겪는 일이다. 스마트폰을 켜고 정신을 차렸을 때 흘러간 시간이 1시간 30분이라면 그나마 양호한 편. 잠자리에 들어서 3시간이 경과한 것을 알아챘을 때 나는 시간을 도둑맞아 큰 충격에 빠졌었다. 그때 나는 시간을 도둑맞은 게 아니라 내가 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자책했다.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했지만 나는 쾌락과 자극이 주는 즐거움에 매번 굴복해버리고 마는 정신박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마침내 나는 아주 작은 방법을 시도했고 지금까지 잘하고 있다. 그것은 유튜브 검색 기록을 저장하지 않고 삭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알고리즘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스스로 유튜브를 켜서 이런저런 영상을 보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한번 켠 유튜브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보여주는 이것저것에 이끌려 헤매지는 않게 되었다. 아직은 이런 나를 기특하게 여기며 생활하고 있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란 얼마나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인지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경험을 하였다.  

언젠가 또 무너질지 모를 나 자신을 불안해하면서, 흔해빠진 자기 계발서일 거라고 착각했던 '도둑맞은 집중력'을 펼쳐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자기 계발서가 아니었다. 전문 저널리스트인 저자 요한 하리는 그가 그동안 해왔던 대로 깊이 있게 취재하고 분석하여 아주 설득력 있는 르포르타주를 세상에 내놓았다. 사람들이 쉽게 읽고 설득당하기 용이하도록 글도 아주 술술 넘어가게 쓰여 있다. (물론 이것은 번역가의 덕일수도 있다.)

작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세상 사람들이 너도나도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을 때 나는 흔해빠진 자기 계발서인 줄 알고 '백만장자 메신저'때처럼 책을 비웃고 세상을 조롱하였다. 사죄한다. 이것은 나의 실수였다. 무엇이든 직접 보지 않고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마라. 해묵은 교훈은 언제나 해를 묵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이 책은 내가 집중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내 탓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치 봄날 내가 기침을 하는 이유가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 탓이며 혹은 날리는 꽃가루 탓이며  대기 중 떠다니는 미세먼지 탓인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나는 봄날 이런 이유로 기침을 하지 않는다. 말인즉슨, 그렇다 이 말이다.)

우리가 집중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이유를 요한 하리는 몇 가지로 근거를 대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정리해 본 바 다음과 같다.


첫째 감시 자본주의 탓이다. 감시 자본주의란, 구글이나 아마존이나, 알리나 유튜브나, 테무 같은 기업을 말한다. 인터넷 세상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고 쾌락을 던져주어 우리 뇌에 지나친 도파민을 뿌려대는 기업들이 우리를 잠 못 들게 하고 그들이 뿌려대는 광고를 쉴 새 없이 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잠든 사람은 돈을 쓰지 않아요.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아요. 지금의 경제 체제는 잠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어요. -118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돈을 벌고 수익을 내어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분해주어야 한다. 더 많은 수익을 위해 기업은 더 많은 광고를 수주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광고를 보여주어야 한다. 광고를 보려면 인터넷 화면에서 잠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된다. 이런 시스템이 알고리즘을 만들고 추천 영상을 뿌려대며 쾌락을 유도한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세상에 더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무한 스크롤 같은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하기도 한다. 인터넷을 하다가 본연의 일로 집중을 해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23분이라는 연구가 있다. 알고리즘과 추천과 쾌락을 무한 스크롤 하다 보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사라지고 다시 해야 할 일로 돌아가는 회귀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둘째, 우리는 갈수록 불안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평상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으려면 반드시 안전하다고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것을 '과각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과각성이란, 일상보다 더 큰 어떤 상태, 즉 잠재적 위험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숲 속을 걷는 데 곰이 나타나면 우리의 뇌는 저녁거리나 집세나 배울 거리에 집중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곰을 피할 수 있을지에 온 신경을 쓰게 된다. 곰을 수시로 만나는 사람은 일상에 집중을 못하는 게 아니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최선의 집중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이 늘 곰을 만나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대한민국에서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늘 불안하다. 내 노후가 걱정되고, 직장에서 언제 잘릴까 불안하다. 혹자는 직장을 얻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불안하며 엄마들은 내 아이가 왕따를 당하지나 않는지 성적이 떨어져 대학을 못 가지는 않는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집값이 올라 좌불안석이고 하나뿐이 자산인 집값이 내려도 걱정이다. 생존 자체가 불안인 사회에서는 무얼 배울지, 무얼 즐길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무엇을 나눌지 하는 일들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


셋째, 모든 일의 원인으로 치부되는 스트레스가 집중력 소실에도 원인으로 꼽혔다. 스트레스를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의 하나로 '일이 많다'는 것이 언급되었다. 책에서 언급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1969년에 비해 한 달에 해당하는 시간만큼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캐나다에서 3만 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는 사람들이 일을 더 많이 할수록 생산성이 떨어지고 더 산만해진다는 결과를 내놓았는데, 이 연구의 결론은 "이와 같은 업무량은 지속불가능하다"라는 것이었다.


많은 업무량은 멀티태스킹을 부르고 빠른 속도를 요구한다. 많은 정보량과 빠른 속도는 과부하를 일으키고 깊이 있게 어떤 일을 심사숙고하는 것을 못하게 만든다. 속도화와 정보화가 가속될수록 깊이 있는 사색, 깊이 있는 관계, 깊이 있는 분석과 멀어진다. 깊이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는 빠른 속도와 팽창된 정보를 얻기 위해 시간과 깊이를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는 캐나다에서조차 현재의 업무량은 지속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는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주 40시간의 노동도 부족하다며 주 52시간으로 늘리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며 더 열심히 일을 더 해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많은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일부 사장님과 어르신들 위주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숫자가 갈수록 퍼센티지가 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집중력 문제는 사회 전체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왜냐면, 집중력이 떨어지면 문제 해결 능력도 저하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사람이 장기간에 걸쳐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진짜 문제를 파악해 공상과 구분하고 해결책을 떠올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 만큼 긴 시간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을 요구한다.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해결책에 이끌리고 그러한 권위주의적 해결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25쪽

업무량의 증가와 노동 시간의 증가를 우려하는 것은 책에서 저자가 위에서 언급한 이런 민주주의 위기가 도래할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아픈 것도 청춘이다'라고 섣불리 썼다가 지탄을 받은 사람과 달리, 요한 하리는 우리의 집중력이 없어지는 것은 거대한 기업과 사회의 욕심이 도사리고 있기때문인 것을 취재와 자료를 통해 알려주었다. 그래서 좋았고 안심이 되었다. 내가 무얼 딱히 그리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 잘못이 아니라서 그저 좋은가?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의미가 없다. 저자는 개인이 다소의 개인적 해결책을 취하기도 해야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집중력을 뺏고 있는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한때 납이 들어간 가솔린을 사용하다가 인체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것이 알려져 납이 포함된 휘발유 생산을 중단했던 것처럼, 석탄을 주 연료로 사용하다가 대기오염에 심해진다는 것을 알고 석탄과 화력발전을 중단한 영국의 사례처럼, 감시 자본주의가 우리의 집중력에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을 널리 알리고 정부 혹은 기업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가 아는 일부 활동가들은 이미 이것을 논의하고 방안을 강구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유연휘발유보다 석탄연료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유연휘발유와 석탄연료는 우리 몸에 공기 중에 눈으로 확인되는 결과를 보여주는 악영향이었다. 사람 개개인이 노력하고 중단하고 말 것이 없었다.

반면, 인터넷과 감시 자본주의 혹은 잔혹한 낙관주의는 개인에게 자유(로 착각되는 어떤 것)와 쾌락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활동가들의 투쟁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지지를 보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미 자기가 원하는 알고리즘에서 보여준 것들을 갖고 정신적으로 무장된 몇몇 개인들은 그 어떤 논리에도 방어하며 자신들의 무논리적 주장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나 혼자 노력'에 머물며 안주할 것인가.



독서 모임에서 디지털 교과서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도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디지털 교과서라니, 엄마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말했다. 디지털 교과서는 절대 안 된다고. 외국에서는 있는 것도 없애고 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고.

누군가 제안했다. 끊임없이 민원을 넣어야 한다, 디지털 교과서를 하지 말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작은 일이라고 해야 한다고. 작은 것이 민원일수도 댓글일 수도 전화일 수도 있을 거라고.


유연휘발유를 없애는 운동도, 석탄 연료 사용을 중지하는 운동도 몇 년씩 걸렸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좌절하지 말고 하나라도 시작하는 것. 우리가 도둑맞은 내 것을 되찾아 오는 일의 시작일 것이다. 내 권리는 나부터 시작해서 찾아야 한다.


이번에도 나는 역시 독서는 도움이 된다, 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다.



두나를 구속한다. 선택지를 좁힌다. 돛대에 자그렇기에 미래의 나를 구속한다. 선택지를 좁힌다. 돛대에 에자신을 묶어 놓는 것이다신을 묶어 놓는 것이다의 나를 구속한다. 선택지를 좁힌다. 돛대에 자신을 묶어 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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