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그만두고 비정기적인 N잡러로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일을 했다. 객원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때로 글을 쓰거나 프로그램을 맡기도 했다. 사회적인 명함이 없어진 나에게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라도 일할 거리가 들어오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수입은 일정치 않았고 크지도 않았다.
하우스갤러리의 첫 전시를 준비하며 계산기를 톡톡 두드렸다. 임대료와 인건비 항목이 0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최소로 쓸 돈을 줄여도 백만원은 필요했다. 전시를 하는데 백만원이라니, 전에 일하던 미술관 전시 예산의 1%였다. 턱없이 적은 돈인 동시에, 사회적 자아의 크기가 1/100로 줄어든 나에게는 그저 큰 돈이기도 했다. 고흐가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주위에 고흐의 물감을 사날랐던 동생 테오의 역을 맡을 사람이 누구인가 살펴보았다.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하우스갤러리의 무대에서 그를 테오로 캐스팅했다. 파리와 서울의 월급쟁이라니 이거 참 캐릭터도 일치하지 않는가. 동시에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첫 번째 전시의 씨드머니이니 백만원을 지원받는 것이라고, 앞으로 나 스스로 지속할 수 없는 전시라면 더이상 하지 않겠노라. 그리고는 이 ‘백만원짜리 전시’를 나 스스로 ‘적정 전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기왕 시작한 일이니 비장해지지도 우울해하지도 말고, 무모한 새로운 프로젝트로 내 식대로 디자인하기로 했다.
예술가의 삶, 예술생태계의 작동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지속가능성이다. 일찍 철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번째 직장이었던 인사동의 화랑에서 나는 자주 월급이 밀렸다. 마지막 달의 급여는 결국 받지 못했다. 갤러리 사장은 미안하다며 창고에서 그림이라도 하나 가져가라고 했지만, 마음이 여렸던 스물넷의 나는 그러지도 못했다. (지금의 나는, 조각을 한 점 들고 나올걸 하고 아직도 이불킥을 한다) 내 삶도 어려웠지만 갤러리의 어려움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한해 수많은 화랑이 문을 닫고 문을 연다. 양극화가 심해져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간판집이 제일 좋겠다 싶었다.
서른 후반,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후로 가장 큰 불안감은 어떻게 내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전시 하나를 시작하며 다시 그 문제를 대면했고 나는 우주의 고민을 끌어안았다. 지속가능한 하우스갤러리는 젠가 게임과 같다. 반드시 없어도 되는 것들을 제거하고, 꼭 필요한 뼈대만을 남기는 것. 나는 계속 의문하며 형식 따위는 과감히 털어내고, 내가 집중해야 할 본질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고민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갤을 준비하던 당시 몇몇의 지인들에게 하갤에 대한 내 구상을 이야기했다. 그 중 하나가 대학후배 지은이었다. 그녀는 예술학과 산업디자인을 복수전공하고 제일기획과 삼성 등에서 일을 했다. 지은은 미술을 좋아해 전공을 택했지만 곧 직관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의 모호함, 이를테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시장의 작동 방식 등에 의문이 생겼다고 했다. 결혼 후 미국으로 MBA를 떠났던 그녀는 현재 텍사스의 글로벌반도체회사에서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은 물리적 만남이 주였다면 팬데믹 이후는 장소를 초월한 인간관계가 진전된 시기였다. 지은이 미국에 살고 있어 우리는 무려 20여 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지만 코로나가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진정으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시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카톡과 줌으로 일상과 고민을 공유하며 울고 웃었다. 곧 호주의 임효영 작가까지 가세해 우리는 '삼대륙'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온라인 회동을 했다. 서울은 저녁 8시, 호주 멀럼빔비는 저녁 10시, 텍사스는 아침 7시, 혹은 정반대의 시간대가 우리의 접점이었다. 이 '삼대륙'에서 집 전시의 여러 뼈대가 만들어졌다. 내가 돈키호테처럼 신이 나서 아무말 대잔치를 하면 작가로서 허심탄회하게 임효영의 이야기가 더해지고, 명석한 좌뇌의 지은은 항상 실현 가능한 대안과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그녀는 미국 정유회사의 기획 파트에서 일하던 경험을 예술의 영역에 적용해, 작품가격이 어떻게 형성되야 하는지 작가와 매개자, 소장자를 둘러싼 그 모든 변수를 고려한 비밀의 엑셀 파일 같은 것 등을 만들어냈다. 우리의 수많은 이야기가 이렇게 엑셀표 한장으로 체계적으로 아름답게 정리될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어느날엔가, 지은은 하우스갤러리2303의 로고는 정했느냐고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집 전시를 위한 나의 예산은 백만원이었다. 로고는 필요하지만, 로고를 만들 돈은 없어서 거기까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삼성에서 브랜드마케팅을 했던 지은은 로고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내가 생각하는 하갤의 이미지를 세 가지 단어로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편안함', '친근함' 등을 이야기했다. 한국 시간 자정이 되어서야 대화를 마치고 자고 일어났더니, 그녀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하갤의 국영문 로고의 다양한 변형이 들어있는 시안이었다. 하우스갤러리2303의 로고는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탄생했다.
아무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집 전시에 대한 구상은 이렇게 작은 로고 하나로 단단하고 아름답게 집약되었다. 하갤의 숨은 조력자 지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하갤도 없었을 것이다. 지은을 비롯한 수많은 지인들의 도움이 쌓여, 하갤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젠가 게임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