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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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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내 Sep 08. 2020

나는 청인, 너는 농인

제2 언어로 [수어]를 선택했다.


 정시 퇴근을 하고 부지런히 이동하면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수어 교육원이 있다. 전화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기초반을 등록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8시까지,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 직장을 다니는 입장에서 이것도 부담이라면 부담이겠으나, 새로운 것을 배울 때에는 무릇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법.


 수어를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마땅한 상황과 경험이 있어서지만, 실천으로 옮기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 19다. 수어와 코로나 19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본업 특성상 상대방의 목소리, 표정, 행동, 뉘앙스를 관찰해야만 하는데 마스크를 착용하며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됐다. 표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로 유추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여러 단서 중 고작 한 가지 제외된 것인데, 그럼에도 부족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는 표정'만' 없는 세상이 아닌, 표정'마저도' 없어진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 있었던가? 코로나 19로 인해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며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에게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면 수화 사용해서 손으로 요래, 요래 대화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애석하게도 수어는 손동작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언어가 아니다. 입모양, 얼굴 표정, 몸짓까지 한데 모여 하나의 수어를 완성시킨다. 마스크를 착용함으로써 입모양과 얼굴 표정이라는 두 가지 큰 축이 사라진 것이다.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론 시중에 입 부분만 투명하게 보이는 마스크를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덴탈 마스크, KF 마스크보다 비싼 편이고, 만들어서 쓰자니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니다. 표정이 아녀도 목소리로 소통할 수 있는 다수의 청인이 과연 소수의 농인과 소통하기 위해 돈을 더 들이고, 마스크를 만들어 쓸까? 당장 내 앞가림, 먹고사는 것이 벼랑 끝에 몰린 마당에 누군가를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을까?


립뷰마스크, 입 보이는 마스크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그나마 수어를 사용하는 청인과 농인은 비교적 상황이 나은 편이다. 난감한 상황은 수화를 사용하지 않고 구화를 하는 농인과, 수어도 모르고 입모양도 보여줄 수 없는 청인에게서 일어난다. 우리네 삶에서는 유튜브처럼 실시간 자막이 달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렇듯 코로나 19는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시국이, 상황이 그렇다 한들 난감한 상황에 처한 농인을 동정한다거나, 돕기 위해 수어를 배우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어떤 상황이든 저마다의 고충이 있기 마련인데, 농인을 돕는다? 이 발상 자체가 틀려먹었다. 내가 청인이라서, 네가 농인이라서 (원하지도 않은)도움을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나와 다를 바 없이 기능하는 존재 아닌가. 농인 사회에서 청인인 나만 덩그러니 놓인다면 소수자는 내가 될 것이다. 그때에도 바라지 않은 동정, 연민, 불필요한 도움에 마냥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할 것인가?


 코로나 19가 등 떠밀어 실천력을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나 그저 영어 공부하듯, 프랑스어 배우듯 내가 몰랐던 언어 한 가지를 배우고 싶었을 뿐이다. 제2 언어로 수어를 선택했을 뿐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여행을 가서 활용하고,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과 다를 것 하나 없다. 내가 몰랐던 언어와 문화를 알고 싶어서.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교감, 신뢰, 사랑, 연대, 호감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므로.


 뭐, 몇 년간 꾸준히 배워 그럴듯한 언어 실력을 갖추고,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과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 머나먼 미래의 일이다. 기초반을 수강하는 동안에는 아장아장 걸음마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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