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지 않아도 좋겠다며 잠든 적이 있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였고, 무언가 크게 틀어지거나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평안해 자연스럽게 죽음에 스며들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마지막 기억이 잠자리에 들었던 내 모습인 것처럼 그대로 꿈꾸듯 죽음으로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 평안한 죽음이라면 내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거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지배적인 때가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오히려 너무 평안하게 욕심 없이 흘러간 특별할 것 없는 내 삶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일까?
반대로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어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다면 죽음의 양상은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이 책 속의 주인공인 '나'가 그랬다. 늘 아이들을 괴롭히고 문제아인 김하균이 구타를 당하고 병원에 실려 갔을 때 도망칠 만큼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하필 잘못 날린 주먹 때문에 김하균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아이들의 입소문에 겁이 덜컥 났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한강 노들섬으로 오라는 알 수 없는 문자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이한 소년을 만나고 말도 안 되는 한강 다리 밑의 벙커 속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나'는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고 싶은 절망감. 몸도 마음도 숨긴 채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벙커였다. 아무도 그곳에 벙커가 있을 거라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마주한 공간. 거기엔 또래로 보이는 메시와 어린 미노가 살고 있었다. 메시는 어쩔 수 없이 한 달 동안 머무르라고 허락해 주었지만 김하균이 죽었다는 소식 앞에서 '나'는 갈 곳도, 왜 이곳에 왔는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기이한 동거가 시작되었지만 그곳에 어느 하나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벙커는 불안전한 곳이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공간이었고 쉽게 생채기가 나고 공간의 크기도 보는 마음에 따라 달라졌다. 그런 곳에 어떤 이유로 메시와 미노가 사는지 모르겠지만 더더욱 알 수 없는 건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나'였다. 김하균이 죽었다는 소식, 그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이 나의 주먹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더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쉼 없이 흔들리고 불안정한 벙커 속에서 계속 살 수 없듯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김하균이 구타당하지 않았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나'는 수없이 생각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벙커라는 공간이 그곳에 실재한 다는 사실도, 그곳에 살고 있는 메시와 미노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첫 만남 때부터 예감했다. 병원에 누워있는 환자들의 신발을 빨아주는 일을 하는 그들 틈에서 그 일을 해보고 다시 벙커로 돌아오는 일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친구들에 의하면 김하균을 죽인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럴 용기가 없었다. 메시는 벙커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하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했지만 도대체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모두가 욕하고 미워했던 김하균의 일기를 읽고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미래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지닌 두 사람을 만났을 때 그제야 벙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마음이란 곳은 쉽게 상처받고 회복은 더딘 곳이다. 만약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그 사람을 더 이해하게 될까? '나'가 머물렀던 벙커라는 공간은 어린 미노의 마음속이었기에 쉽게 생채기가 나고 불완전하며 그 공간 자체가 안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비현실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며 불안하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어린 아이 마음이었으니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어른인 나보다 더 단단하고 꿋꿋한 면을 발견했을 때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타인을 밀어내기만 했던 우리내 마음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서툴지만 보듬어주고 감싸주는 미노의 마음속은 지켜보기에 허술했을지 몰라도, '나'가 머무르기엔 그곳만큼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곳이 없었다.
벙커에서 나온 '나'는 깨어났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누워 있었고 '나'는 김하균을 때려 죽게 만든, 벙커로 도망쳤던 반장이 아니었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한사람이었고,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나에게만 생지옥이었다. 그럼에도 이젠 달라져야 했다. 벙커에서 한 달 동안 머무르면서 타인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미래의 엉망인 '나'를 만났다. 그것만으로 변화되기에 충분했고 새로 주어진 인생을 재정비 할 용기가 생겼다. 미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그 전의 '나'와 별다를 바 없이 살아갔을 거라 생각하면 그것만큼 힘 빠지고 무기력한 일이 없다.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이 처절할 정도로 불안하고 엉망인데 바꿀 용기가 없어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면 그것 또한 통탄할 일이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마음의 이야기가 있다. 그 마음의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없다면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그간 내가 쌓아왔던 허술하고 엉망인 벙커 속을 제대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먼저 벙커의 주인인 내가 단단해져야만 한다. 이젠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만으로도 잃을 게 많기에 서투른 내 마음의 벙커를 반드시 지켜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