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산 <코끼리는 안녕,>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잠들기 전에 굉장히 해괴망측한 로맨스를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최근에 본 드라마나 읽은 책에서 배경을 빌리고 여주인공은 나를 채워 넣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간절히 잠이 들다보면 꿈속에서라도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에 그런 상상이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오랜만에 그런 로맨스를 다시 꿈꿔봤다. 저자도 이 작품을 '연애소설, 그것도 판타지 로맨스'라 했으니 이번만큼은 나의 상상력에 날개가 돋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동물원에서 드라큘라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처음 드라큘라의 등장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드라큘라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에 당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드라큘라가 사랑한 미라(붕대의 상징, 그녀!), 미라에게 엄청난 책을 사준 환생, 사소한 이유로 헤어진 전 남자친구 민구까지 미라와 얽혀있는 모습을 보며 누구의 로맨스인지 인물들의 개연성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 현실로 대입하려는 나의 의도 때문에 빗나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로 처음에 이 책을 너무 진중하게 펼쳤다가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그러다 가볍게,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자고 생각을 바꾸니 금세 마지막까지 술술 읽어버렸다.
드라큘라와 주인공 마리의 당황스러웠던 첫 만남이 있었지만 드라큘라의 나름 귀엽고 덤덤한 면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마늘 먹을 줄 알아요?/ 돈 떨어지면 마늘 까.' 란 대화라던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기가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랬다. 사소한 거짓말로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드라큘라와 만나면서도 많은 것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이 소설을 유치하게 볼 수도, 솔직하게 볼 수도 있는 요인인 것 같았다.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가운데서 의외로 반대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반대말로 오해하고 헤어진 경우가 비단 이들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경험이 깃든 나의 20대 초반이 생각나게 만들어 준 소설이기도 했다.
사소한 오해로 연인에게 상처주고 헤어진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오히려 솔직하게 말을 했더라면 그렇게 많은 상처를 내고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을 거란 후회가 인다. 솔직하게 말을 해도 오해하는 세상인데 왜 그때는 그것이 진실을 말하는 거라 생각했을까? 소설속의 인물과 행동을 보면서 이상하게 나의 서툴렀던 연애시절이 생각이 났다. 동물원의 코끼리가 죽고 미라가 뱃속에서 나온 사건에서도 드라큘라의 사랑이, 드라큘라를 위해 관을 짜주던 마리의 마음이 의아하면서도 공감이 갔던 건, 나에게도 비슷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게 될 거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 아니겠지.(21쪽)
이 작품을 통해 저자에게 가장 놀랍고 고마웠던 건 바로 이 사실이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 그리고 사그라져버릴 수 있는 허무하고 무모한 이야기, 때론 꼭 필요한 이야기까지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지 않는 능력.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입을 빌려 들려주는 많은 이야기들. 그럼에도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체. 인과관계, 작품의 구성에 미흡함이 느껴졌더라도 다음을 기대해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툴고 심심하지만 우리가 하는 연애가 이런 연애일지도 모를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