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소금사막>
며칠째 어떤 말 한마디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는다. 그 말의 위력은 엄청나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말이 들려올 수밖에 없던 원인제공을 내가 했으니 제풀에 꺾여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떠한 행동도, 어떠한 말도, 어떠한 부탁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그 말. 나는 그 말을 뚫고 나올 수 있을까. 한없이 외로운 시간 속에서 그 말을 깨치고 나가는 순간, 내 안에 평안이 깃들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말 속에 갇힌 나, 내 안에 스스로 장막을 쳐버리고 두껍게 벽을 만들고 있는 나에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어떤 위기가 오면 사람들은 손에 쥐고 있는 것, 현재의 안락함을 더 붙잡고 싶어 한다. 나 역시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칠 때가 많다. 그래도 그것들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그때는 포기한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김영희 pd도 '나는 가수다'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을 때, 그리고 남미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남미로 여행을 떠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과정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내가 모든 것을 놓을 수 없는 상황, 한마디의 말이 나를 붙잡고 있는 현실이 닥치고 보니 나와 동류였음을 깨닫고 그제야 온전히 그의 여행에 동행할 수 있었다.
'나는 가수다'의 뒷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을 거라 생각했다. 60일간 29번의 비행기를 타고 떠난 남미 여행 이야기지만 이 안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낱낱이 드러날 거라 생각했다. 책장을 펼친 순간부터 그런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그를 따라 남미를 여행하면서 막상 기다리고 있던 이야기가 나오자 굉장히 낯선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순간 부끄러웠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타인에게 전할 가십거리였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전달받아 전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책장을 기웃거렸던 내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이 책 속에는 저자의 모든 마음이 들어있었다. 복잡하고 힘들었던 마음, 여행의 즐거움 혹은 당황스러움, 지나온 일에 대한 후회와 새로운 용기가 모두 내포되어 있었다. 또렷한 대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고 그의 다른 마음일거라 생각했던 시간들은 온전한 그의 모든 것이었음을, 남미를 함께 거닐면서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스케치북 속에 그려진 그림들과 짤막한 말들이 내 마음을 아프도록 후벼 팠었던 이유가.
다시 한 번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도 이제는 지금이 아니다. 세월의 흔적만 남기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소금사막』 115쪽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멍하게 책장만 바라보면서도 '인간은 어떠한 선택을 해도 후회하게 되어 있다'란 말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차피 후회할거라면 지금 흘러가는 이 시간에 충실한 것이 최선일 것 같았다. '사심을 불태워버리'고 '가슴속에 진실만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가 본 남미의 풍경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 어떠한 생각에 고정되어 있으면 모든 말들을 그 생각과 연관시켜 받아들이게 되는데, 나에게 이 책이 그랬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이 그의 말과 마음속에 온전히 녹아있었다. 광활한 자연을 보면서 다시 볼 수 없는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관찰하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없다. 변하지 않는 삶도 없고 변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신뢰는 변치 않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라곤 하지만 변하는 마음속에서도 신뢰를 얻고 싶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 내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내게 돌아온 말 한마디에 휘둘려질거라면 애초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된다. 언제까지 '사라질 것이 두려워 시작을 망설일' 것인가. 시작하자. 그리고 용기를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