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는 이중인격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by 안녕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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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간단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는 즉시 위협당한다고 느끼게 마련이다. (8쪽)


이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모르긴 몰라도 절대 살갑게 다가거나 먼저 알은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적대감을 가지고 멀리 할 것이며 좋게는 각자의 성정이며 나쁘게는 이상한 사람이라 취급하면서 내 영역(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울타리)을 위협하면 최선을 다해 대응할 것이다. 그럼에도 뫼르소란 사람에게 일어난 일들을 낱낱이 목도했다. 때론 목도에 그치지 않고 감정에 휘둘려 복잡 미묘한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한 순간들도 있었다. 왜 이 사람을 면밀히 관찰하는지 명확한 이유를 드러낼 순 없었지만 그가 보여준 반항, 진실, 솔직함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요양원에 있던 엄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르러 마지못해 가는 모습, 엄마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엄마 외에 모든 것을 면밀히 묘사하는 소설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이유가 드러나길 바랐다. 신파스럽더라도 왜 그렇게 은폐하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보통의 윤리를 지니고 있지 않은 뫼르소의 모든 것이 말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지닌 무관심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는 물론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무관심이 조금 변화를 일으킨 것은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였다. 작품해설에는 ‘그의 원초적 순진함 속에 살인사건은 균열을 가져’온다고 되어 있는데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느꼈던 그의 생각들과 감옥의 현실 사이의, 그의 자유롭게 떠도는 상상과 벽에 갇힌 좁은 공간 사이의 괴리’를 마주하고 나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한다.

뫼르소는 살인이 자신에게 일어난 ‘우연’이며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끼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대한다.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그것이 살인행위보다 ‘범죄자의 마음으로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했다는 이유로 선고되었음에도 ‘언어의 코미디를 연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모든 결정에 순응한다. 하지만 그는 살인자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까지 끌어와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는 사실을 이끌어 내려는 무리들이 오히려 인간의 추악함이 드러난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면서 씁쓸했다. 뫼르소가 살인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아랍인을 자신이 죽였다고 인정했고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태양'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살인을 저지른 행위가 정당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떠한 이유에라도 살인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아랍인을 죽인 죄책감이 없는 그에게 분노를 느끼는 검사의 마음도 이해가 가면서도, 본 적 없고 보이지 않은 뫼르소의 삶과 생각과 내면을 억지로 끌어다 결부시키는 모습이 누구에게나 내 안의 다른 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 같았다.

죽음을 앞둔 뫼르소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려는 사제에게 쌓여있던 내면의 분노를 쏟아낸다. 기쁨과 분노를 동시에 쏟아내며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당신(사제)보다 더 있다고 외친다.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너도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생애 전체에 걸쳐,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도 않은 세월을 거쳐서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157쪽)


사제로 인해 ‘뫼르소는 거기서 스스로의 인격을 의식하는 인격을 획득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를 사회로 복귀시킴으로써 그를 자신에게서 추방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인간들에게서 떨어지고 싶은 욕구’의 ‘모순상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면서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라며, 사형선고를 받게 된 진짜 이유에 대한 부조리를 법정에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으면서 사제에게는 그것 또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엄마 생각을 한다. 어째서 엄마는 죽음 가까이에서 해방감을 느껴 약혼자를 만들 만큼 생애를 새롭게 시작할 마음이 생겼는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그제야 엄마를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아무도 없다며 아들로서 슬퍼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하는 듯하다. 타인인 당신들도 슬퍼할 권리가 없으며,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할 권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죽음에 대해 반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고 말했듯이 사제에게 뱉어낸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준 것처럼,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세계가 자신과 닮아 형제 같음을 느끼자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면서. 그리곤 자신의 소원은 사형집행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그럼에도 이 뫼르소란 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쉽지 않다. 여전히 불편한 사람이고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기도, 그의 잘못됨을 지적할 수도 없이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게 예우인 것 같다. 다만, 죽음의 해방을 통해 알게 된 행복을 삶에서 알게 되어(이건 모두에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어지지만) 뫼르소다움을 펼쳐보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 방식은 왜인지는 몰라도 뫼르소에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지지만 그가 죽음의 해방을 통해 깨달았듯이 삶을 통해서도 그랬으면 어땠을지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사형보다 엄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정당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느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죽음 앞에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부조리에 행복한(?) 죽음으로 대응하는 부조리에 적응한 사람들에 의한 희생양 같다는 생각 또한 멈춰지지가 않는다. 뫼르소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행위에 대한 정당함은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저자는 독자의 혼란을 예감하고 뫼르소 안에 꼼짝없이 가둬버린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저마다 말로 대가를 치르려 하고,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 드는 세계에 대하여 그는 이방인이다. 뫼르소는 이중인격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말처럼 철저하고 확고한 이방인을 만났다. 뫼르소를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과연 나는 나에 대해 내 주면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 본적이 있을지 생각해보면 나 또한 아닌 척 하지만 뫼르소가 가진, 적어도 진실한 ‘이방인’이 아닌 모순 가득한 ‘이방인’을 자처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더 못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 또한 내게 주어진 일인 것 같다. 조금은 맥 빠지는 다짐일지라도 뫼르소의 죽음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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