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완 <12.12 쿠데타와 나>
영화 『서울의 봄』을 보지 않았더라면 장태완 장군을 몰랐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답답했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먹먹했던 기억이 가득하다. 분명 12·12 군사반란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왜 저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지 답답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까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영화를 볼 때처럼 막막함이 나를 지배할까봐 두려웠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역사를 오롯이 목도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것도 분명 울화가 터질 것 같은 상황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그래서 책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읽기를 차일피일 미뤘는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열 때마다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이라 굳이 마주해야 하는지 몇 번씩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의무감 아닌 의무감으로 마주한 진실은 나를 그날의 사건 현장으로 데려다 놓은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생생했다. 당연하지 않아야 함에도 장태완 장군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씁쓸했다.
12·12 군사반란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거듭 말했듯 오래전부터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정치군인들이 주도하에 치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214쪽
장태완 장군의 기록이 드러나면 날수록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계획된 쿠데타’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군대에서 사조직은 엄연히 이뤄져서는 안 되지만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일명 ‘윤필용 사건’ 때 하나회를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거대해졌고, 10·26 사건부터 12·12 군사반란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윤필용 사건’이 일어났을 때라도 하나회 조직을 와해시켰다면 이런 참담함은 겪지 않아도 됐을 거라는, ‘만약’이라는 가정에 자꾸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장태완 장군의 생생한 증언으로 그날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지만 참담함의 몫도 만만치 않았다.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장군을 무장 병력까지 동원해 강제 연행하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협박 같은 재가를 요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공관에서 총소리가 나자 이웃에 있는 단국대학교 체육관으로 아들과 부인 등 가족을 데리고 피신을 가 있었다. 느지막이 국방부에 도착해서 ‘소수 정치군인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상황에 대처하지 않고’ 경계가 허술해서 불안하다며 실병력이 있는 수도경비사령부로 옮기자고 지시한 뒤 본인은 미 제8군 벙커로 숨어버렸다. 군대라는 체계가 이렇게 허술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과 곪을 대로 곪아버린 조직에 제대로 된 군인이 몇 없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지켜보는 이도 이러한데 현장에서 이 모든 사실을 겪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장태완 장군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이 모든 일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지 24일 만에 일어났으니 죄책감과 무력감도 엄청났을 것이다.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불충의 죄를 갚기 위해 진압의 유일한 책임 지휘관으로서 진압 작전의 상세한 상황일지 및 경위, 진압 실패 원인 등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언젠가 있을 공정한 진상규명과 주동자들에 대한 단죄를 위해서라도 실증적 증언을 기록으로 남겨 둬야 또다시 군사 쿠데타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332쪽
이 책은 12·12 군사반란 기록의 의미로 엄청나다. 하지만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 죄책감과 참담함을 가눌 길이 없어 쓴 울분을 토하는 독백으로 볼 수 있다. 장태완 장군은 시종일관 군인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죄인으로 법의 단죄를 받아야 할 인물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했다. 장태완 장군은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이유만으로 옥살이를 하고,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난다. 결국 예편을 하고, 아버지는 장태완 장군이 군대에서 강제 퇴출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얼마 안 가 돌아가시고, 서울대 자연대학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한 아들은 의문을 죽음을 당하고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렇게 모진 세월을 견딘 뒤 장태완 장군이 심장 수술을 받기 직전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일념하에 초고를 쓰고 6년 뒤에 이 책이 출간되었다. 이후의 장태완 장군의 삶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2010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2년 뒤에 부인은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인의 삶을 이렇게 몇 줄로 읽어 내려가도 되는지 복잡다단한 마음이 들면서도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버텼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정의로운 편에 선 사람은 더 고통받아야 하는지 영화를 볼 때 보다 더 참담해졌다. 그럼에도 역사는 그 과정에서 희생된 3명의 군인들(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과정에서 사살된 김오랑 소령, 국방부 헌병중대 정선엽 병장, 수경사 33헌병대 소속 박윤관 일병) 을 포함해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기록이 진심으로 ‘공정한 진상규명과 주동자들에 대한 단죄를 위해서라도 실증적 증언을 기록’이 되어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