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책과의 만남에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입해 놓고 3년이 훌쩍 넘은 어느 날 그냥 꺼내서 재밌게 읽었다. 그간 출간됐던 책처럼 그림만 보고 싶었고 짤막한 글을 읽고 싶었는데 이 책은 나의 바람과는 달리 글이 빽빽했다. 그래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우연히 꺼내들고 보니 상뻬 할아버지가 뉴요커 표지 그림을 그린 시절에 관한 인터뷰였다. 그 인터뷰가 왜 그렇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인터뷰를 통해서 그간 겉핥기만 하던 상뻬 할아버지의 그림을 깊숙이 들여다 본 기분까지 들었다.
풍자화가라는 직업은 존재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직업이에요. 화집을 낼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지요. 그것조차도 덧없는 느낌이지요! (37쪽)
덧없는 느낌이라고 했지만 미국의 유명한 풍자 잡지의 표지를 그리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전혀 덧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덧없는 느낌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그림을 그리고 도전하고 끊임없이 관찰하고 표현해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이 있는 게 아닌가란 조심스런 생각이 들었다.
그간 상뻬 할아버지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어떻게 이런 그림이 나왔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에 화집이 나올 때마다 반갑게 구입하곤 했지만 글이 거의 없는 화집을 순식간에 보고는 혼자서 떠드는 리뷰를 써댔었다. 그런 일들이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지지만 이 책을 만나면서 화집을 보며 떠들었던 나의 방황(?)이 정착한 기분까지 든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런 그림을 그리기까지의 과정과 뉴욕에서 작업했던 이야기들이 있어서 좀 더 재미있게 그림들을 바라본 게 아니었나 싶다.
우수에 젖고 싶으면 아주 즐거워 봐야 해요. 즐거워 보지 못하면 우수에 젖을 수도 없어요. 즐거운 게 뭔지 모르니까요. (66~67쪽)
상뻬 할아버지의 그림을 볼 때마다 익살스러운 그림도 많지만 뭔가 고독한 그림도 많다고 느꼈다. 그런데 고독보다는 우수에 젖은 모습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됐고 그 우수의 이면엔 아주 즐거웠던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행복할 때 이 순간이 과거가 되어버리는 게 아쉬웠던 기억이 있은 터라 그림 속에 드러나는 우수를 그제야 제대로 보게 된 셈이었다.
인터뷰를 제외하면 뉴요커 표지에 실린 그림들이 대부분이라 뭔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처음 뉴욕에 와서 그곳을 거닐고 분위기를 살피고 그림을 그려냈던 상뻬 할아버지의 흥분과 고민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기존과는 달리 상세하게 봤다. 그래서인지 뉴욕 이야기뿐만이 아닌 책장에 빼곡히 쌓인 그의 화집을 다시 꺼내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면을 좀 더 들여다봤으니 이제 그림으로 더 가까워지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