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한균 Aug 02. 2024

1. 해협 이야기 (부산)


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보자.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겐 지도를 보는 취미가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이국(異國)들을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보며 상상하곤 하는 것이다. 이따금 그러면 일본이란 나라가 멀지 않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지도를 펼치고 내가 사는 도시에서 동남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쭉 내려가면 땅이 끝나고 대한해협이 보인다. 그 건너 부산 앞 대마도를 지나 일본 본토. 시선이 그리 자연스레 닿게 된다. 여행은 이 방향을 따라서 뱃길로 그대로 따라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번 여행은 일종의 도피였다. 그 무렵 세상살이가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도중이었다. 답답한 마음 어디론가 떠나고만 싶었다. 그래서 마음을 먹은 당장 다음날 출발하기로 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하루 만에 해외여행 준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바쁘게 준비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집 베란다 창고에서 나의 노란 캐리어를 부랴부랴 꺼냈다. 인터넷으로는 숙소를 예약하고 배표를 확인했다. 일본 여행에는 비자가 필요하지 않아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이리 하루 만에 해외여행을 시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동네 기차역까지는 캐리어 가방을 끌고 걸었다. 얼렁뚱땅 시작이다. 거기서 고속철도를 타고 3시간이 채 되지 않게 달리면 바로 부산역에 도착한다. 다행히 부산 국제여객항은 걸어갈 만한 거리였다. 그곳에 시모노세키로 출항하는 배편이 있다.

처음 와 본 부산역 @촬영


부끄럽지만 내 인생에서 부산은 처음이었다. 지금껏 방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촌놈처럼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두리번거리며 기념사진도 찍었다. 부산의 첫인상은 상상 이상으로 화려했다. 아마도 산과 바다 사이 좁은 공간에 현대적인 빌딩들이 몰려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도시의 뾰족한 개성이다. 그렇게 새로운 도시를 곁눈질로만 구경하며 안내표를 살폈다. 역에서 바다까지는 차도와 같은 눈높이로 내려가지 않고도 부산의 길 위를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스카이워크 덕분이었다.


부산 국제여객항 터미널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바다를 등 뒤로 그 세련된 모습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위층으로 올랐다. 다양한 노선의 선박사와 여행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중 ‘부관훼리’라는 회사를 찾아 승선신청서를 작성해야 했다.


사실 배편을 통한 해외여행은 흔치 않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광 정보 시스템을 통해 확인해 보자. 1년간 전체 출국자 중 오직 2%만이 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 98% 절대다수에게 해외여행은 비행기로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처럼 배를 통해 해외여행을 가는 것을 계획할 때 아쉽게도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 


항구 테라스로 나아가니 바닷바람이 불었다. 내가 탑승할 성희호도 그 모습을 드러냈다. 독에 정박한 흰색의 선체. 새삼 여객선의 그 크기가 놀라웠다. 여행이 시작되었단 생각에 어느새 가슴이 설레어왔다.

성희호 @촬영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뱃길은 역사가 오래된 노선이다. 1905년에 처음 운항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철도와 연결되어 ‘관부연락선(関釜連絡船)’이라 불렸다.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釜山)의 이름을 각각 땄다. 일본 내지와 식민지 조선을 잇는 중심 노선이었던 만큼 종전까지 총 수천만 명이 이를 통해 바다를 건넜다. 


리에게는 노래 ‘사의 찬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그 노래를 부른 조선 최초의 여성 성악가 윤심덕은 유부남이었던 김우진과 이 배를 탔었다.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둘은 자리에 없었다. 다른 승객 누군가가 밤 중 둘이 같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봤다던가. 조선 최초의 정사(情死) 사건이다. 혹자는 그 노래와 레코드를 팔기 위한 최초의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다 일본이 패망했다. 제국의 동맥이었던 노선은 운항이 멈췄다. 이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나서야 재개되었다고 한다.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 가사에 나오는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이 바로 이 배편이다. 재일 교포의 고국 방문을 주제로 한 노래였기에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의 찬미’와 ‘돌아와요 부산항에’ 두 노래를 떠올리면, 이 배편이 정말 근대 한일관계를 상징한다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이 노선은 한국 국적과 일본 국적의 배가 번갈아 운행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한국 국적의 배를 타게 되었다. 앞서 말했던 성희호다. 찾아보니 한국에서 최초로 건조한 카페리선이고, 시설이 비교적 좋아 일본 배보다 더욱 선호된다고 한다.


터미널에 나 혼자 캐리어를 의자 삼아 앉아 있으니 다른 승객들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중년의 한국 여행객들이다. 일부 일본인이나 외국인의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승선할 시간이 되자 모두 제법 분주했다. 긴장하며 수속을 마치자, 바로 배를 탈 수 있었다. 브릿지를 건너 배에 들어오자 제법 널찍한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들어서자 바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자판기다. 오직 일본 엔화만 사용할 수 있어서 국제선을 탔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이 배는 격일로 매번 밤 9시가 되면 부산에서 출항하여, 어두운 밤바다를 달려 다음 날 7시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한다. 그러다 보니 수속은 저녁 이른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식사할 시간이 나지 않아 먼저 2층에 있는 선내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날의 메뉴는 제육볶음과 된장국이었다. 한동안 먹지 못할 한식이란 생각을 반찬 삼아 식욕을 돋았다. 외국에 나가면 가능한 현지식을 지향하기에, 늘 마지막 한국에서의 식사는 든든히 먹어둔다. 


그리고 출항까지 시간을 보낼 곳은 대욕장(大浴場). 누군가에게 이 배 여행을 추천한다면 그 이유는 아마 이 바다 위에서의 목욕일 것 같다.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담그며 창밖의 부산 풍경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선상으로 나가보니 바다를 가로지르는 부산항 대교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여행이 끝나고도 지금의 나는 부산을 생각하면, 어둠 위 조명으로 빛나는 그 다리를 먼저 떠올린다. 


그날 내가 본 부산은 밤이 되어 더 아름다웠다. 어쩌면 바라본 시점이 달라서일지도 모른다. 항구 도시는 늘 배에서 바라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고들 한다. 산 아래 고층빌딩들과 저 멀리 컨테이너가 가득 찬 물류 항들의 야경(夜景). 부산항 대교가 인상적인 이유는 그런 경치를 반으로 가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다리 넘어 펼쳐진 바다는 그저 어두울 뿐이었다. 그렇기에 도시와의 그 대비가 더욱 선명했다.

출항하는 배에서 찍은 밤의 부산 @촬영


배가 어느새 출항했다. 뱃머리를 다시 항구 밖으로 돌려 나갔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덕분에 여유롭게 선상에 머무르며 화려한 부산과 어두운 밤바다를 번갈아 구경했다. 꽤 오래 머물렀다. 낯 간지러운 일이지만, 그 밤바다에서 감수성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즐겼던 것 같다.


내 방은 삼등실이었다. 고로 여러 다른 승객들과 방을 같이 써야 한다. 사실 업그레이드를 하면 개인 침대방으로 바꿀 수 있었지만, 전날 부랴부랴 예약한 터라 그럴 정신은 없었다. 다행히 그 하룻밤 동거인들의 숫자도 많지 않을뿐더러 다 점잖은 사람들이었다. 뱃멀미를 걱정하기도 했으나 그리 방해되지는 않았다. 남 코 고는 소리가 약간은 불편하긴 했다. 그 핑계로 아까 그 자판기로 가 일본 맥주 한 캔을 꺼내었다. 술김에 파도를 느끼며 잠들었다.


누군가 배를 타고 시작하는 여행이 어떤지 묻는다면, 나는 추천하고 싶다. 비용 우위나 이동과 숙박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에게는 첫 시작의 설렘을 오래 즐길 수 있었던 게 컸다. 여행은 출발하는 그 순간이 가장 즐거운데, 그 기분이 오래 남을 수 있었다.


야마구치현(山口県)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해협이다. 여행지에 대해 여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을 듯하다. 내가 가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그 해협이었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일본의 가장 큰 본섬, 혼슈(本州)는 길게 뻗어있는 활과 같다. 그 서쪽 가지 끝이 바로 야마구치현이다. 마치 다른 일본의 섬 큐슈(九州)에 닿기 위해 손가락을 뻗은 모양세다. 하지만 둘 사이는 차마 닿지 못했고 때문에 좁은 바다가 둘 사이를 가른다. 간몬해협(関門海峡)이다. 이번 여행에서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도착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해협은 땅을 갈라놓지만, 바다는 되려 잇는다. 일정 중 간몬해협을 다룬 박물관에 갔을 때 눈이 뜨이는 설명문을 보았다. 이 지역에 얽힌 옛 신화에 관한 것이었다.


먼 옛날, 간몬해협에서 가장 좁은 하야토모의 해협은 하나로 이어진 산이었으며, 그 산 중턱에 있었던 동굴은 ‘아나토’라 불렸습니다. 어느 날 한반도의 신라로 진군하던 진구 황후 선단이 가까이 오자, 하루 사이에 아나토가 갈라지면 간몬해협이 생겼고, 산 일부가 현재의 히코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네로서는 일본의 진구 황후 이야기가 마뜩잖은 것은 어쩔 수 없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녀는 바다를 건너와 당시 삼한을 정벌했다. 이 전설적인 천황의 이야기는 당연히 역사적 근거가 없지만 일본 신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더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진구 황후는 일종의 재발견 되었는데, 제국주의 시기 그 숭배가 극성에 달했다. 대표적인 예로 1881년 2월 일본에서 인물의 초상을 새긴 지폐를 처음으로 발행했는데, 이 1엔 지폐의 주인공이 바로 진구 황후다. 당연히 당시 일본의 군주였던 메이지 천황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천황 스스로 사양했다고 한다. 이렇듯 사실상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 정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하지만 그 허무맹랑함을 여기서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동굴이 갈라지면서 해협이 생겼다는 이 이야기를 신화로 되짚어 보자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이 간몬해협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 해협은 나라의 안과 밖을 잇는 통로라는 점이다.


간몬해협이 잇는 바다는 동해와 세토내해다. 잠시 일본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비록 외국의 눈으로 지리를 바라보기는 어렵지만, 상상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두 바다는 다르다. 세토내해(瀨戶內海)는 일본의 심장부들을 아우른다. 따라서 일본사는 이 부근을 주 배경으로 진행된다. 반대로 동해는 이러한 흐름에서 약간은 빗겨있다. 따라서 동해와 맞닿은 곳은 변경이었다.


우라니혼(裏日本)이란 단어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일본 내 지역 차별 용어다. 우리말로 치자면 ‘뒷일본’이다. 일본을 크게 둘로 나눠 세토내해와 태평양에 닿아있는 지역을 앞, 동해에 닿아있는 부분을 뒤라 부른다. 따라서 이 용어는 인구가 적어 낙후되고 배제된 지방들을 의미한다.


여행 중 기차를 탈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노선의 한자 이름들이 눈에 익기도 한다. 산요선(山陽線)과 산인선(山陰線). 산을 기준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음양(陰陽)으로 나눈 것이다. 흔히 해가 닿는 산의 남쪽 면을 양이라 하고 북쪽 면은 음이라 한다. 지금의 기차 노선은 주고쿠산맥을 중심으로 1300년 전 정한 행정구역 유래한 이름들이다. 역시 산의 어두운 쪽을 지나는 산인선은 중앙 정부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다.


그런데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에서 출발하여 산요와 산인은 나란히 달려 이곳 야마구치에서 마지막으로 만난다. 그 끝은 당연히 시모노세키다. 야마구치현은 이러한 일본의 양면을 이어주는 지역이다. 안과 밖, 앞과 뒤, 그리고 양과 음. 


물론 오히려 그렇기에 이 지역을 간몬해협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하나의 해협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대한해협이다. 일본이라는 섬나라와 대륙이 가장 가까이 위치한 땅 중 하나가 야마구치현이었다. 그렇기에 특히 한반도와 지속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따라서 일본의 안과 밖을 잇는다는 표현이 절묘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의 사람들은 가끔은 나라 밖을 꿈꿨고, 또 반대로 오히려 두려워하기도 했다.


물론 나의 여행이 답사는 아니다. 하지만 길 가다 보았던 어느 오래된 유물이나 유적의 설명문이라도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 지역의 오우치나 조슈 가문, 혹은 메이지의 근대 역사는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될 수 있었다.

모지코 근대 역사 문화 지구 @촬영


이번에 시모노세키에서 페리를 타고 해협을 건너 큐슈에 들르기도 했다. 일종의 근대 역사 문화 지구라고 할 수 있는 모지코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레트로 지구와 철도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우습게도 개인적으로는 딱 군산을 떠올렸다. 하긴 군산은 일본이 호남지역의 쌀을 가져가기 위해서 만든 일종의 당시 신도시였으니 겹치는 느낌은 당연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복고풍의 건물들과 항구 도시.


화려했던 근대의 기억은 그렇게 전시되고 있었다. 그런 거리를 천천히 걷다 보니 당연히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일본의 근대는 자랑인데, 왜 우리에게는 그렇지 못할까?’


굳이 일본에 여행까지 와서 나라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는 이미 낯간지럽다. 하지만 새삼스레 떠올릴 만한 주제인 것 같다. 


책 ‘총, 균, 쇠’의 시작은 이렇다. 저자에게 뉴기니인 친구가 물었다. "당신네 백인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원주민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걸까?" 이 화두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책을 썼다. 또 한때 인기를 끌었던 ‘대분기’라는 책에서는 서양과 그 외의 세계가 이렇듯 수준 차이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따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이런 세계사적인 거대 담론보다는 동아시아 지역의 문제가 더 피부에 와닿는다. 우리는 동양과 서양과의 ‘대분기’씩이나 보다는, 조선과 일본의 ‘소분기’가 더 궁금하다. 어디서부터 왜 달라진 것일까?


이것이 야마구치현을 이번 여행의 목표로 삼은 이유였다. 일본 근대화를 견인한 세력이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흔히 조슈번(長州藩)이라고 불리던 이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개혁운동이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다. 그 공간이 궁금했고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야마구치현을 일본 보수의 산실(産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긴 지금까지 유일하게 일본 총리를 8명 배출한 지역이면서, 가장 최근에는 ‘신조 아베’ 총리의 지역구이기도 한 것은 그런 맥락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부분도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여행이 그저 관광(觀光)을 넘어서는 경험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그러한 거창한 테마에도 불구하고 놀기도 열심히 놀았다. 유명하다는 온천과 맛있다는 식당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 이 글은 나의 취미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긴 한 것이다.


알람이 울리는 소리로 삼등실 바닥서 잠에 깼다. 다른 승객들이 불편할까 조심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창을 통해 보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도 어두웠다. 하지만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은 낯선 바다와 땅이었다. 밤 동안 배는 열심히 달려 일본에 도착했다.


배에서 찍은 간몬해협 @촬영


아예 선상으로 나가 난간에 기대었다. 오가는 배편에 쓰인 한자들을 그저 바라보았다. 도착지에 왔음이 실감 났다. 부산에서 조금 멀어지는 순간 점차 약해졌던 통신 신호 역시 돌아왔다. 바다 사진이나 몇 장 찍었다. 솔직하게 날씨 때문에 볼만한 풍경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분위기만은 담고 싶었다.


그동안 배는 시모노세키항에 닿았다. 안내에 따라 짐 검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꽤 적막한 곳이다. 작은 소도시 항구다운 느낌이었다.


일단은 숙소에 짐부터 맡기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비도 오는데 캐리어를 끌고 낯선 도시를 돌아다닐 수 없다. 다행히 계획한 지 하루 만의 출발이었음에도 마구잡이로 숙소를 예약한 것은 아니었다. 늘 교통편 가까운 곳을 우선 고려해 두었다. 덕분에 시모노세키 숙소도 항구에서 걸어서 갈 거리였다. 그렇게 짐 속에서 우산을 겨우 꺼내어 거리로 나섰다. 


비 오는 날 일본 거리를 걸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 습도와 빗소리. 출근 시간대라 우산을 쓴 정장 차림이 눈에 띈다. 이 와중에 자전거를 타는 학생도 있다. 호텔에 도착하자 안내인이 맞아주었다. 일단 영어로 예약 내용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데 영어를 못 알아듣는 표정이다. 되려 고개를 까딱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짐 맡겨드려요?”


한국어다. 다행이다. 아무래도 부산에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찾아오는 곳이다 보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나 보다. 캐리어를 맡기고 보관함 번호를 받았다. 


기차역은 다시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앞은 버스터미널도 겸하고 있어 매우 혼란스럽다. 그 때문에 지하도를 통하지 않고도 길을 건널 수 있는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그 육교에 올라서 보면 눈에 띄는 조형물이 보인다. 바로 ‘부산문’이다. 시모노세키로 온 관광객들은 흔히 재빨리 기차나 버스를 타야 하기에 지나치기 쉽다고 한다. 하지만 제법 의미가 깊단 생각이 들어 먼저 찾았다.


시모노세키의 명물 '부산문' @촬영

이 항구와 기차역이 있는 골목 뒤로 과거 한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쇠락한 어느 중소도시 상권이라고 하지만 그 역사는 제법 인상 깊었다.


타고 온 배에서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동승객이었던 부산 토박이 아저씨와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분에 따르면 예전부터 이 노선으로 보따리상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어 부산 국제시장에서는 못 찾는 일본 물건이 없었다고 한다. 하긴 그 시절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한국은 당시까지 폐쇄적이었던 나라였을 테니 일종의 숨구멍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산과 시모노세키는 서로 나름의 영향을 주고받으며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 흔적은 이렇게 지역 명소로나마 남았다.


배에서 아침을 걸러 배가 고팠다. 마침 영업 중인 동네 가게에 들어갔다. 전형적인 일본 가정식 가게였다. 한자와 일본어로 쓰인 메뉴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운데서 나이가 지긋하신 종업원분들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고 계셨고, 냉장고에는 음식들이 포장된 모습을 보아하니 반찬가게도 겸하는 것 같다. 혼자 온 손님들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일본 식당은 이렇게 1인분만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아 마음에 든다. 일단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번역기와 씨름하다가 눈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 鯨汁 (고래고깃국)


글쎄, 우리나라에서도 경상도 해안가에서는 옛날에 고래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구경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너무 당당하게 쓰여있었다.

시모노세키의 동네 식당 @촬영

처음 보는 음식이 있으면 먹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손가락으로 직접 메뉴를 가리키며 주문했다. 솔직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다. 고래는 멸종위기종이라는데 먹어도 될지 고민이 들었다. 외국이라고 해서 행동거지가 달라지면 안 될 텐데 궁금증은 이기지를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가 나왔다. 밥에 단무지, 연근에 고등어. 그리고 문제의 바로 그 국. 두부와 채소로 만든 새하얀 맑은 탕이었다. 그 안에 아주 작은 고래고기가 종종 들어있었는데,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육향이 밴 물고기 맛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비가 조금은 잔잔해져 있었다. 여행 직전 일본의 환율이 크게 떨어져 계산하면서도 한국과 비교하면 저렴하다고 생각했다. 외국에서 맞는 여행의 첫 아침. 배도 채우니 마음이 조금은 급해졌다. 부지런히 구경하고 일정을 소화해야지 싶다. 물론 여행은 취미이고 따라서 평안하게 여유를 즐겨도 좋겠지만, 바쁘고 정신없는 여행이야말로 내 취향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