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그리스 신혼여행기
1. 신혼여행
결혼을 생각하면 떠오르 것은 아테네에서 만난 작은 빵집이다. <HARRY’S KITCHEN>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빵집은 신타그마 광장에서 가까운 작고 오래된 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작은 문이 가게의 전부고 식탁들을 길가에 내놓고 파이를 판다. 그리스인들에게 파이는 한국인에게 쌀밥과 같은 느낌이다. 어쩌다 하는 외식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평상시 가족들과 먹는 것이 파이다. 그리스어로 빵을 피타라고 하기 때문에 시금치를 넣은 파이를 스파나코피타, 치즈를 넣으면 티로피타, 감자를 넣어 먹으면 파타토피타다. 사진에는 그 피타들을 모두 앞에 깔아놓은 모양을 찍었다. 이러한 다양한 파이 중 그리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시금치를 넣어 만드는 스파나코피타인데, 상상하는 것과 달리 시금치의 풍미가 살아나 빵의 맛이 살아나게 된다. 마치 한국에서 빵에 파나 부추를 넣는 것과 같다고 할까?
<HARRY’S KITCHEN>라는 이 맛있는 파이 가게는 중년과 노년 사이의 어느 부부가 운영한다. 30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장사를 해왔다고 한다. 아침 일찍 시장에 나가 신선한 치즈를 사오고, 다양한 빵들을 구워 팔고, 가게를 정리하고 치우고, 집에 가서는 다음날 요리할 시금치를 통에 넣고 데친다고 했다. 말 그대로 동업자이자 반려자이다. 그분들은 가정과 직장에서 늘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누군가와 하루를 준비하고 살아가고 끝마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결혼하기 전 내가 고민했던 문제였다. <HARRY’S KITCHEN> 부부가 같이 살아온 30년이면 내 나이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앞으로 30년 동안 그런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여행이 끝나고도 가끔 그 부부의 삶을 혼자 상상하곤 한다.
지금 나는 신혼생활 중이다. 결혼을 한지 한 달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새신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로 20일 정도 다녀온 신혼여행을 글감으로 삼으려한다. 인생에 딱 한번 있을 여행이기 때문이다. 여행 중 보았던 것과 느꼈던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뿐만은 아니다. 신혼으로서 내 결혼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혹은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생각들도 글로 쓰며 정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먼저 한번 생각해보려고 한다. 신혼여행이라는 건 묘한 풍습이라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결혼이란 것은 30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근래에 중요시 되는 가치인 ‘지속가능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중차대한 결혼을 시작하는 의식이 여행이라는 점에서 묘하다. 여행이란 건 본질적으로 낯선 것이다. 예측 불가한 것이다. 모르는 곳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다. 결국 여행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여행의 재미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 자체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분들에게 여행이 여행처럼 느껴질까? 그분들에게는 여행이 또 다른 일상이자 일이 아닐까?
따라서 신혼여행은 지속가능성과 예측불가능성의 불편한 결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평생 같이 살아갈 것을 약속하면서, 일상에서 도망치는 것이니까. 내 생각을 지원해주는 근거도 있다. 한국일생의례사전에 따르면 신혼여행이라는 것은 여성이 평생 겪게 될 시집살이에 대한 정신적 위안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대한민국 최초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여성작가 나혜석이라고 한다. 나혜석이 신혼여행지로 선택한 곳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첫 사랑의 무덤이었다.
정말 결국 신혼여행이 앞으로 있을 결혼에 대한 보상일까? 지속가능성에 부차적으로 따라올 불쾌한 부산물들, 예를 들어 일상의 권태로움이나 줄어든 가능성을 수용하게 만들어 주는 이벤트인걸까? 휴가란 일상 이후에 찾아오는 휴식이다. 만약 그렇다면, 신혼여행이란 일상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휴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나에게는 또 다른 이론이 있다. 내 생각에는 여행은 오히려 결혼생활의 예행연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행을 하다보면 생각지 못 했던 좋은 경험도 그리고 나쁜 경험도 잔뜩 하게 된다. 기대치 않았던 여행지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하루 종일 멍하니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비싸게 주고 예약했던 호텔이 가보니 춥고 더러울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경험을 옆에 있는 사람과 받아드리고 나누는 것이다. 결혼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결혼 한지 한 달 된 새신랑이 결혼생활에 대해 무엇을 알겠냐 싶다. 그래도 결혼생활이란건 모든 사람들이 다 오지랖 부리고 싶어 하는 대상이고, 모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HARRY’S KITCHEN> 부부가 30년 동안 파이를 만들며 성취한 일들을 상상한다. 이미 해낸 일들. 예측불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펼쳐졌던 수많은 일들.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여행 동안 안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2. 파란색과 하얀색
여행을 다녀오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는 어땠는지 물어본다. 좋았다고 대답하긴 하지만, 사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를 말해줘야 할까? 아니면 어떤 곳이 제일 좋았는지 말해야 할까? 이 글에서는 그리스하면 떠오르는 풍경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스 국기는 파란색과 하얀색의 조합이다. 미코노스에 도착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달리 무슨 색일 수 있을까?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마을도 모두 하얀색이거나 파란색이다. 바다는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하늘은 파랗고, 건물 외벽은 하얗고, 문도 파랗다.
흔히 그리스 하면 떠올리는 하얀 회반죽을 바른 네모난 집들은 키클라데스 제도 건축의 특징이다. 멀리서보면 마치 블록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한국에서는 포카리스웨트 광고에 나오는 마을로 유명하다. 건조한 기후, 짠 바닷바람, 내리쬐는 태양빛에서 실내를 보호하기 위한 방식이지만, 그 아름다움 때문에 이제는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때문에 여름 성수기가 끝나면 겨울 동안은 섬마을이 모두 페인트칠을 새로 한다고 한다.
미코노스 숙소에 들어가서 체크인을 하니 호텔리어가 결혼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넨다. 여행사에서 허니문이라고 표시해 둔 티가 났다. 덕분에 좋은 일도 생겼다. 신혼여행이라 하니 호텔리어의 표현을 빌리면 방을 "업그레이드의 업그레이드" 해주겠단다. 1층 독채에 건물에 딸린 수영장도 있단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다.
여행에서 너무 좋은 숙소는 사치라고 생각해 적당한 숙소만 묵다보니, 이런 고급 휴양지 호텔은 정말 새롭긴 했다. 소셜미디어에서 나오는 것처럼 침대에서 나와 문을 열고 수영장으로 뛰어들 수 있는 광경을 연출할 수도 있었다. 또 선선한 밤에는 동네 고양이들도 지나다녀 인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숙소로 업그레이드 받을 수 있다니, 결혼이란 건 그리고 신혼여행이라는 건 좋은 거였구나 싶기는 했다.
그래도 역시 호텔이 좋긴 하구나 싶었던 것은 경치였다. 호텔 방에서 앉아있다면 푸른 바다와 흰색 마을이 어러져서 빛났다. 다시 파란색과 흰색이었다. 어느 날은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쏟아져 수영복을 입은 채로 방 안에서 철학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독서를 할 기회가 없어 철학책 역시 오랜만이었다. 순수하게 어떤 목적이 없이 내 기쁨을 위해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스는 흔히 말하는 신혼여행의 성지다. 어디를 가든 전 세계에서 몰려온 신혼부부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언어로 말하는지 또 피부색이 어떤지에 상관없이 신혼부부는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남편들이 카메라로 원피스를 입은 아내를 열심히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은 견제하는 마음도 들면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맛도 있다.
일정 중 요트투어에서 겪었던 일이다. 수영을 잘 하는 백인들 사이에 쭈뼛거리고 있는 우리에게, 어느 사람 좋은 커플이 말을 걸어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들은 알고 보니 1주일 전에 결혼한 미국 신혼. 다른 맞은편에 앉아있는 커플도 호주 신혼. 우리는 한국 신혼. 어쩌다보니 신혼부부들로만 이루어진 요트였다.
그리스의 어떤 점이 이렇게 가정을 막 이룬 연인들을 모으는 걸까?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점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나는 어느 정도 에해 그 풍경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눈이 시릴 정도로 산뜻한 색들에 둘러싸이면 누구나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된다. 나 역시 덕분에 신혼여행 내내 인생의 다음 장을 생각할 수 있었다.
3. 에게해와 이오니아해
이렇듯 그리스는 바다를 빼놓고 말할 수는 없다. "소금기 섞인 바람이 불어오는 땅에는 그리스인이 산다"는 말이 있다. 고대 시절부터 그리스인들은 황량하고 산맥으로 가로막힌 땅에서 벗어나, 바닷길이 닿는 곳곳으로 퍼져나가 마을을 짓고 살았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그리스 땅에서 시작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현대 그리스 역시 바다와 늘 연결되어 있다. 지도를 펼쳐보면 수많은 섬들과 만(灣)들이 눈에 띈다. 그래서 그리스는 남한의 1.2배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지만 해안선은 지중해 국가들 중에서 가장 길다. 전세계 순위에서도 몇 배는 더 큰 나라들을 뛰어넘어 11위에 위치한다. 덕분에 여행 기간 내내 바다를 실컷 볼 수 있었다.
한국처럼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다. 북쪽이 대륙과 맞닿아 있다는 점도 같다. 그리스의 동해는 에게해, 서해를 이오니아해, 남해를 리비아해라고 부른다. 리비아 해는 크레타 섬 너머 아프리카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의 바다는 에게해와 이오니아해이다.
이번 그리스 여행의 목표 중 하나는 두 바다를 모두 보는 것이었다. 흔히 그리스 여행이라고 하면 아테네에 도착해서 파르테논을 구경한 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산토리니 같은 에게해 섬을 관광하는 코스로 이루어져있다. 다행히 신혼여행이 장기여행이었기에 그리스의 다양한 바다를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여행은 흔히 말하는 에어텔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내가 여행계획을 짜서 여행사에 알려주면 그곳에서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해주는 방식이었다. 반(半) 자유여행이라고 할까? 짧게나마 여행사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에어텔이야말로 가장 싸게 여행사 혜택을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을 배워두었다.
결혼식을 끝내고 다행히 이틀을 쉬었다. 결혼 직후 신혼여행은 쉽지 않다는 조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두바이를 경유하여 꼬박 하루를 비행기를 타 아테네에 내렸다. 파르테논을 눈에만 담고 저녁을 먹은 뒤에 다음날 미코노스를 시작으로 에게해 여행을 시작했다. 에게해에서는 추가로 산토리니와 크레타까지 페리를 타고 다니며 구경을 한 뒤 다시 공항으로 돌아간다.
다음은 렌트카를 통한 이오니아해 여행이다. 서쪽 이오니아해를 향하여 필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가 코린토스만을 따라간다. 델피와 파트리스에 도착한 뒤 서쪽 끝 이오니아가 감싸고 있는 아름다웠던 섬 케팔로니아에서 이틀을 보낸다. 본토로 돌아와서는 바다를 따라 이오니아(Ionian)해의 이름을 딴 요아니나(Ioannina)와 마테오라를 내륙에서 지나 아테네로 돌아간다.
바다와 산, 동과 서. 모두를 일주하는 신혼여행이었다. 이 계획을 들은 지인은 "그리스인도 그렇게 여행 안 하겠다"며 웃었다. 하지만 충분히 가치 있었던 것은 그리스의 두 바다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 있다.
에게해는 섬들이 기암절벽이다. 화산섬들과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은 절경을 만들어낸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황량한 대지, 그리고 새하얀 마을과 푸른 바다가 에게해의 풍경이다. 섬 아래서 보면 마치 마을들이 소금을 뿌려놓은 듯 혹은 산위의 만년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면에 이오니아해는 훨씬 푸르르고 산뜻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자연'에 가깝다고 할까? 동화 같은 마을들이 펼쳐져있다. 그리스에서도 여름 휴가지로 더 쳐주는 곳이 오히려 이오니아라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이오니아의 다섯 섬들은 이탈리아에 더 가깝기도 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에게해는 '고대적' 같았다면, 이오니아해는 '중세적'이었다.
여행은 '근대적' 시간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한다. 평소에 나 역시 많은 시간을 계획 안에서 생산적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늘 조급함에 시달렸다. 노동하고, 소비하고, 정보를 받아드리고 처리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신혼여행 동안은 읽어야 하는 글보다는 읽고 싶은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장소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시간도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신혼여행기는 각 머물렀던 섬마다 도시마다 떠올렸던 생각들을 적을 계획이다. 작은 메모들과 일기를 사초(史草) 삼아 여행을 되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시몬 보부아르는 낯선 도시에서의 이틀이 익숙한 환경에서 보내는 30일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낯선 환경과 여행의 예측불가능은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그리고 감각을 더 열고 사고를 더 깊게 할 수 있다. 이 글을 통해서 그런 순간들을 잡을 수 있다면, 여행이 조금 더 가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