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묵상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모츄 Mar 29. 2024

절기 때만 되면

누가복음 23 : 44~5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23:46,47)


어제 저녁 일이다. 이 동네는 밤 8시면 모든 상가가 대부분 문을 닫는 곳인데, 왠일로 동네 성당에서 많은 차들이 하나씩 밀려나온다. 무슨 일이지? 아, 사순절(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고 동참하는 교회절기) 기간이구나. 성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내가 먼저 알아차렸다. 아 그렇네, 부활절이 4월 초에 있지. 오늘자 생명의 삶 본문도 그에 맞춘 듯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다루고 있다.


누군가의 신앙을 폄훼할 마음은 없다. 나 개인적으로 절기를 '지킨다'는 이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사순절에 비해 성탄절기는 좋아하는 편이다. 비록 그날이 명백한 탄생일과는 성경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이들의 말처럼 이교도 문화가 혼합된 날짜라 할지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적어도 되바라진 유난을 떨 일은 별로 없어서다. 내가 말하는 유난 떠는 느낌이 뭐냐하면, 평소에는 뭐 대강, 신자가 아닌 것처럼 살다가도 절기가 되면 예수의 고통을 직접 동참하네 마네 하고, 초를 올리거나 새벽기도를 나가거나 작정헌금을 하고, 개인기도도 갑자기 열심히 하면서 자못 신심이 있는 척 하는 행태 같이 보여서 느끼는 거부감을 말한다. 평소에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이 살다가, 요때만 되면 '얼마나 아프실까'를 부르면서 눈물을 짜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정말... 이에 비하면 새해 벽두 금연결심은 기특해 보이기라도 하지.


이런 역함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자의적 해석이라 할지는 모르겠으나 구약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있었음이 떠오른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음성이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려고 오지만, 누가 그것을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뜰만 밟을 뿐이다. 헛된 제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마라. 분향은 내게 혐오스럽고 초하루 제사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거룩한 집회를 열면서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딜 수 없다. 내 마음이 너희 초하루 제사들과 너희 절기들을 싫어하니, 그것들이 내게 짐이고 내가 지기에 지쳤다."(사1:12~14/바른성경)


하나님의 말인즉슨, 평소에 잘 해야지 왜 무슨 때만 되면 이러는 거냐. 그러는 너희를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럽고, 그러는 너희가 내 백성이라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말이다. 이들이 어떤 상태길래 하나님이 이리도 슬프게 진저리를 치신 걸까? 이사야서는 그 이유도 밝히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소돔의 지도자들아! 우리 하나님의 율법에 귀 기울이라, 너희 고모라의 백성들아!"(사1:10/우리말성경)


문맥상 이들은 실제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들이 아니라, 불심판의 대명사인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처럼 살고 있는 현재의 자기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 삶은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처럼 살고 있는 현실을 가감없이 팩폭하고 계신다. 더 나아가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여, 그들이 많이 기도한다해도 내가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이다(사1:15).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도 이사야는 대언한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6-17)


절기를 지키고 예물을 드리고 기도를 올린다 해도 하나님은 기쁘지 않으시단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람노릇하면서 잘 살아가면 그것이 더 기쁘시단다. 더 나아가 이타적인 인격을 소유한 존재로 빚어져 가는 것을 좋아하신단다. 그러니 내가, 사순절이라고 갑자기 차가 몰리는 이 현실이, 부활절이라고 교회연합행사가 성대하게 열리는 이 시대가, 남루하게 느껴지고 유난 떠는 듯 생각되는 것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지 않을까.


듣자니 올해 부활절 연합예배는 교회세습 문제로 여전히 시끄러운 모 대형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자기가 세운 교회는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라고 십계명에 써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의 두 계명이나 바울의 명으로 기록된 것도 아니니 그걸 내가 가타부타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다음 세대에는 누군가 세습할만큼 큰 교회가 사라질 가능성도 있으니 교회 입장에선 그게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를 향해 들리는 수많은 비난과 조롱의 목소리는 여전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내일 죽으면, 누군가 나에 대해 백부장처럼 이야기해 있을까? 나는 과연 그런 삶을 살았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이다.


누구는 일개 신자를 예수님과 비교하는 거 아니라고 하지만, 예수로 말하자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시요 대제사장이시며(히3:1),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히4:15) 그분에게 의지하여 신앙을 영위하라고 성경이 가르친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다음과 같이 드러나리라고 성경은 독려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악된 양심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씻고, 맑은 물로 몸을 씻었으므로, 확신에 찬 믿음과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의 믿음을 단단히 붙잡읍시다. 이는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과 선한 일들을 격려하기 위해 서로 돌아봅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들 스스로 모이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고 오히려 서로 권면합시다. 또한 그날이 다가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렇게 합시다."(히10:22-25/우리말성경)


눈치 챘겠지만, 히브리서의 기록은 위에 적은 이사야서의 말씀과 참으로 흡사하다. 신앙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고, 삶으로 그 신앙을 증거하는 방법은 사람답게, 사랑과 선행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신 바도 동일하지 않은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내일 죽더라도, 누군가 우리를 향해, 심지어 그가 우리를 죽인 집행자라 할지라도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할 있도록 사는 것우리의 지향점이 되어야 마땅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것이 내 마음의 실체이며, 성령님의 직접 개입이 없이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위태한 성정을 가진 나다. 매일같이 그것을 느낀다. 이 육체의 유혹, 안목의 욕망이 언제나 끝이 날까. 수많은 신학자들이 단언하듯 이생에서의 영화(완전한 성화)는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니, 코로 숨쉬는 동안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간단하다. 오늘처럼, 어제처럼, 위태하지만 끈질기게 예수를 붙잡고 있으면 된다. 이제껏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 우리의 믿음의 사도이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유일한 제사장되신 예수를 의지하여, 그의 보내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오늘처럼 살면 되리라.


이 연약한 붙잡음이 가능하도록, 신자의 권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그리고 그 아들을 보내신 성부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래서 오늘도, 감사의 눈물로 기도를 대신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잘못이 없다고 생각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