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4:20~34
고대 왕국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시절인 솔로몬 대왕의 시절, 오늘 본문은 거기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그가 다스리는 땅은 아버지가 정복한 것보다도 너른 영토였고, 군사력도 대단하고 물질적 풍요도 굉장했다. 주변 나라들은 이스라엘에게 호의와 존경을 보냈으며 솔로몬왕은 당대 누구보다 지혜롭고 뛰어난 군주로 도 묘사된다. 그가 쓴 지혜의 서는 삼천편에 이르고, 그가 지은 시가 역시 천여편이나 된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 하나님이 내리신 복락이다.
솔로몬의 영광은 오늘 어디에 남아있을까. 그의 영광은 오늘 어디에도 없다. 그가 채 죽기도 전에, 무리한 노역을 강행한 그를 향한 원망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그의 사후 왕국은 바로 두갈래로 흩어졌다. 그가 수많은 왕국의 여인들과 정략적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자식을 낳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두갈래만 나뉜 것이 신기할 정도다. 또한 대를 이어 임금이 된 아들의 어리석은 언사를 성경에서 보노라면, 그의 지혜는 자식에게 물려주지 못한 듯 하다. 온갖 자연의 이치와 현상에 대해 끝없이 말하고 가르칠 수 있었던 솔로몬이었지만(왕상4:32~33), 아들 혹은 타인에게 자기의 지혜를 물려줄 수 있는 지혜는 갖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그의 부강한 왕국은 2대도 이어지지 못하고 끝이 났고, 그의 대단한 지혜 역시 그와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 누구에게도 전수되지 못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큰 시험을 앞둔 아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곤 한다. "솔로몬같은 지혜를 주시옵소서." 솔로몬처럼 지혜롭게 된다면 여러모로 좋기는 할 것이다. 공부도 잘 할 수 있고 사업도 잘 할 수 있고 대인관계도 좋을 수 있고 어쩌면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강한 연대를 형성할 수도 있을테니까. 그러나 정작 솔로몬이 일천번제라는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께 구한 것은 세상이치를 깨닫는 지혜도, 강성한 군대도, 부유한 나라도 아니었다. '판결할 때 필요한 분별의 지혜'를 구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왕상3:11/우리말). 그러니까 솔로몬같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옳고 그른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지혜'이지, 수능을 잘 본다던가 국가시험을 잘 치를 수 있는 능력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융성한 왕국이 허망하게 끝난 것은 그가 정작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해서였다.
솔로몬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여호와를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쪽 언덕에 모압의 가증스러운 신 그모스를 위해, 또 암몬 사람의 가증스런 신 몰록을 위해 산당을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에서 온 자기 왕비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했고 왕비들은 그 우상들을 위해 분향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마음을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고, 이 일에 대해 다른 신들을 따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런 일을 해 내가 네게 명령한 내 언약과 내 규례를 지키지 않았구나. 그러므로 내가 이 나라를 반드시 네게서 찢어내어 네 신하에게 줄 것이다.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서 네 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아 찢을 것이다. 나라 전체를 찢어 내지는 않고 내 종 다윗과 내가 선택한 예루살렘을 생각해서 네 아들에게 한 지파를 줄 것이다.”(왕상11:6~13/우리말)
하나님께 지혜를 받은 덕에 자기 백성들을 향해서는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솔로몬이었지만, 자기 인생을 향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과 징계의 길로 접어들었다. 하나님을 향해 그가 내려야했던 올바른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시점으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그의 소원에 기뻐한 하나님은 분별의 지혜 뿐 아니라 부와 명예도 덤으로 주겠다고 하신다(왕상3:11~13). 그리고 아래와 같이 말씀한다.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3:14)
하나님을 따르는 길로 걸어가라고 했다. 그분의 뜻과 명을 듣고 지키고 살아가는 삶을 산다면, 선왕 다윗이 살았듯이 그렇게 살아가라고 했다. 잠깐, 다윗이 하나님의 뜻과 명을 듣고 지키는 삶을 살았던가? 그는 자기 부하의 아내와 통간하고 부하를 살인교사하기까지 했었는데. 누군가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명을 지키는 삶이었노라 말하려면, 완전무결한 신앙을 분투해야 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인생은 그럴 수 없는 존재들이며, 전도서의 표현을 빌자면 '헤벨'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연약하기가 이를데 없을 뿐 아니라 순간에 사라지는 안개나 먼지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구약성서가 기록하는 다윗의 두서너가지 커다란 죄악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네 아버지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갔던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다윗과 다른 솔로몬과 사울왕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자기 뜻대로 행했다는 점일 게다.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었고, 사울왕에게는 사무엘 선지자를 보냈으며, 솔로몬에게도 두번이나 (아마도 어떤 선지자를 통해) 분명한 의중을 전달했다. 그들의 상황적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전언이었다. 다윗은 뉘우치고 그의 길을 다시 바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울왕은 선지자를 설득해 오히려 자기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고 했고 솔로몬은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께 받아누린 지혜와 부와 명예는 그의 영혼을 위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 자기 영혼을 향한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다.
나도 두렵다. 내게 주신 재능들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 내가 이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그리고 노래하고 온 세상에 퍼트린들, 결국 솔로몬의 삼천가지 잠언처럼 허망해 질 뿐이다. 그것은 헤벨로 돌아가 곧 잊혀지고 마는, 순간의 것들일 뿐이다. 내게 주신 선한 마음들, 공동체와 교회를 향한 좋은 마음들도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 솔로몬의 지혜조차 그와 하나님 사이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 주지는 못했다. 나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이 세상을 잠시 살다 가면서 솔로몬처럼 진짜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못한 채 끝날 수도 있기에. 나도 두렵다.
날이 지날수록, 순간순간이 선택이라는 것을 느낀다. 예전에는 세상을 향한, 교회를 향한, 공동체를 향한... 주로 타인을 향한 분별의 지혜를 꺼내들었지만 언제부턴가 나 자신을 향한, 내 인생을 향한, 내면의 유혹과 시험을 향한 바른 분별과 선택만이 나를 하나님 앞에서 살리는 길임을 느낀다. 솔로몬이 지혜로 이룬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받은 부와 명예나 분별의 순간들이 다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재능과 선의로 했던 일들이나, 혹은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던 어떤 잘못된 일들에 대한 판별이나 저항, 거절들이 모두 쓸데 없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그것이 교회 밖이건 안이건, 누구를 향한 일이었건 간에. 그것은 그것대로 어떤 의미가 있었고 어떤 것들은 오늘까지도 옳음의 범주에 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분별의 지혜를 꺼내들기 전에, 스스로를 위한 바른 선택을 순간마다 해야하고 그것이 비할 수 없이 막중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설령 다윗처럼 어느날 무너져 큰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다시 그 선택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시작해야 영원을 향한 가망이 있다는 것이 이전과는 다르게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 정말 잘 살아야 한다. 재능, 지혜, 부와 명예,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유지하는 웰빙이 아니고, 하나님의 길을 걷는 그것에서 늘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설혹 떨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 그 길로 되돌아가는 삶을 반복하고 의지적으로 걸어가야 한다.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열심이, 나의 유약하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영원의 나라까지 온전히 이끄시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그것만이 내 궁극적인 소망이 됨을 다시금 느낀다. 실수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쓰러지지 않고 완주할 방법도 없다. 다만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다시 돌아오고 돌이키고 또다시 걸어갈 수 있는 은혜가 끊이지 않기를 오늘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