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1. 위화도 회군

<사건 개요>

by HistoryFile


1387년 겨울,

개경 조정은 갑자기 달라진 대륙의 기류를 감지했다.

명나라가 요동 방면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고려의 전통적 영향권이던 압록강 동쪽 고을들까지

사실상 점거하려는 조짐을 내비친 것이다.


우왕과 재상 최영은 “주권 수호”를 내세워

요동 원정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이성계는 장마철·병참·역병·명분 모두가 불리하다는

‘사불가(四不可)’론을 내세우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1388년(우왕 14년) 봄,

조정은 결국 출병을 결정했고,

선봉은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맡겨졌다.


1388년 4월 하순,

개경에서 출정한 본군은 황주·평양을 경유해

서북로를 타고 북상했다.

평양 북쪽의 안주·정주를 지나며

강우가 잦아 도하 준비는 거듭 미뤄졌고,

군량은 장마철 물길과 진창길에 막혀 수송이 지체됐다.


5월 초순,

본군이 의주에 닿자

압록강 하구의 모래섬 ‘위화도’로

전진 기착지가 정해졌다.


강폭이 넓고 물살이 바뀌는 시기라

도하 창구를 열려면

대형 뗏목과 도선이 충분히 갖춰져야 했지만,

빗줄기와 역병의 기미가

먼저 막사 사이를 스며들었다.


이 무렵 장막 안 군사회의에서

이성계는 다시 한번

“장마 속 요동 도하는 병력 소모와 민심 이반만 키운다” 는

논리를 내세웠고,

참군(參軍)과 장교들 사이에서도

“돌아가 나라부터 바로잡자”는 말이 낮게,

그러나 넓게 번졌다.


결정적 전환은 5월 중·하순 위화도의 밤에 이루어졌다.

강 건너 봉화는 잠잠했고, 강물은 불어나 있었다.

“명일 도하”라는 형식적 명령이 전해진 뒤,

이성계는 조민수 등 핵심 장수들을 불러

회군을 결행한다는 최종 의사를 통보했다.


지시의 요지는 간명했다.

“도하는 하지 않는다. 질서를 유지한 채 뒤돌아 남하한다.”

그 순간 요동을 향하던 행군의 화살표가 개경으로 뒤집혔다.

선발대는 의주 일대에 흩어진 병참대를 정리해 끌어모으고,

후미는 군율을 강화해 무질서한 약탈을 금했다.

회군군은 반란의 아우성 대신 ‘통제’의 질서로 남하를 시작했다.


6월 초, 회군군은 정주·안주·평양을 되짚으며 속도를 높였다.

개경에선 뒤늦게 이상 조짐을 알아챈 최영이 방어를 지시했지만,

방어군은 이성계의 속도전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회군군은 개경의 군문부터 장악해 병력 이동을 봉쇄했고,

중간 관료·군관들을 신속히 회유하거나 교체했다.

최영은 유배 끝에 그해 늦가을 처형되고,

공식적 군권마저 회군군 지휘 체계로 완전히 이양됐다.


정변의 정치적 수습은 ‘명분’을 앞세운 단계적 교체로 진행됐다.

1388년 여름,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로 밀려났고,

어린 창왕이 옹립되어 표면상 왕통의 연속성을 유지했다.


실무 행정은 정도전이 설계하고,

조준이 토지와 재정을 손질하는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회군 직후 가을까지 중앙과 지방의 군현(郡縣)에는

인사와 군량 장부가 재정렬되었고,

서해·압록강 유역의 요충지들—평양·안주·의주—에는

신임 지휘관이 배치되어

군의 역류 가능성을 차단했다.


1389년, 창왕이 퇴위되고 공양왕이 즉위하면서

고려 왕조는 외피만 남게 된다.


이때까지도 이성계는 즉위하지 않았다.

위화도의 ‘되돌림’을 ‘건국’으로 잇는 과정에서,

그는 군권·재정·행정·명분을 순차적으로 확보하는

고전적 ‘단계론’을 택했다.


그 사이 북방 방어선은

정벌 대신 현실적 방어로 전략을 바꿨고,

대외적으로는 명과의 충돌을 피하며 국력을 비축했다.


1392년 여름,

위화도에서 시작된 물결은 멈추지 못할 속도로 흘러

마침내 새날을 열었다.


공양왕이 물러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며 조선이 개창되자

1388년 5월의 위화도 회군은

“왕조를 바꾼” 첫 번째 분기점으로 역사에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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