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노트 1-4. 요동정벌의 성공가능성

위화도 회군이 없었다면 요동정벌은 성공했을까?

by HistoryFile


요동정벌은

우리 역사 속에서 이성계의 정치적 야망에 의해 좌절된

대륙진출의 꿈처럼 그려지기도 했고,

당시 명과 조선의 국력을 비교하며

애초에 성공이 불가능한 무리한 원정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이렇듯 요동 정벌의 성공 가능성은

오랫동안 회자된 역사의 논란거리였다.


과연 요동정벌의 성공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물론 정확히 모든 변수를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러 기록들과 자료들, 정황들을 토대로

합리적인 수준의 추론을 해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고 유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요동 정벌의 성공 가능성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모인다.


“장기 점령은 구조적으로 매우 불리하고,

제한 작전만이 조건부로 가능했다”


하지만 요동정벌은 애초에 이러한 부분들을

면밀히 검토한 후 만들어진 판이 아니었다.

그 안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이미 출발부터 서로 어긋난 톱니들이 보인다.


우왕과 최영의 원정 기획의 가장 큰 문제는

그 목적 자체가 모호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구호는 표면상 “북방 영토 회복”이었으나

그 안에는 실제로 달성해야 하는

서로 다른 성격의 목표들이 뒤섞여 있었다.


압록강 국경선을 확인하려는 방어적 시위,

명의 신설 방어망을 흔드는 국지 공세,

요동 평원으로 영향권을 넓히려는 실질적 진출,

외교전을 염두에 둔 선제타격.


어느 방향으로 군을 이끌어 가야 하는지

정확한 목표 타겟이

원정군 사령부에 명확히 전달되지 않았다.

목적이 섞이면 설계도 당연히 엉킨다.


‘근방 성채 한두 곳을 단기 타격하고 돌아온다’는 계획은

3~5일 전개, 1~2일 교전, 즉시 철수라는

단정한 시간표로 끝나지만,


‘평원 진출’은 다중 거점 점령과 차단선 유지,

교량‧도로 보수, 후방 창고 연계라는

공병·병참·의무 체계의 상설화를 요구한다.


이 차이를 작전 명세서로 못 박지 못하면

현장의 지휘관은

매일같이 “더 들어가느냐, 여기서 멈추느냐”를

임기응변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 즉흥성이 위화도에서의 의사결정 지연으로 쌓였고,

나아갈수록 정치적 책임은 무겁고,

돌아설수록 군심은 흔들리는 이중 비용이 동시에 커졌다.


무엇보다 전투력과 유지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고려 최정예 기병과 궁수는 단기 교전에서 강했다.

그러나 장기 원정의 승패는

먹이고, 재우고, 치료하고, 말을 굴리고,

화살과 마초를 채우는 ‘유지력’에서 갈렸다.


대략 원정군 3만, 말 1만을 가정하면

병사 하루 곡물 1~1.5kg, 말 사료 7~10kg만 잡아도

하루 40~60톤의 보급이 필요하다.


강을 건너는 순간 후방 창고와의 연결은 끊기고,

수레와 우마차, 선박의 재집결과 전진 보급소

사전 적치 없이는 일주일도 못 버틴다.


반면 명은 요동에 다층 성채망과 역참‧창고를 겹겹이 깔아,

밀리면 다음 선으로 붙는

방어-지속 체제를 만들던 중이었다.

초기 교전에서의 질적 우위가 승리를 안길 수는 있어도,

화살과 궁시, 말굽쇠와 마초, 의약품 같은 소모재가

강을 건너는 순간 고려는 절대 열세였다.


간단히 말해 싸움은 이길 수 있어도,

이긴 뒤 버티기는 매우 어려웠다.


계절과 지형, 질병의 삼중 리스크는 더 거칠었다.

원정 시점은 장마였다.

압록강은 계절 변동이 극심해

도하가 가능한 시간창이 하루, 길어야 며칠로 좁다.


수위와 유속이 오르면 가교 설치가 지연되고,

선두가 강심에서 흩어지는 사이

선두와 후미의 간격은 위험 수준으로 벌어진다.

설령 무사히 강을 건넜다 해도

요동 평원의 성채 간 거리는 멀고 도로는 진창이 된다.

수송 효율이 급락하고,

장마와 습열 환경에서 장티푸스, 이질, 학질과 같은 질환이

전투 한 번 없이도 대오를 쉽게 갉아먹는다.


장기 원정의 진짜 적은 창과 칼이 아니라

수송과 병원체라는 전쟁사의 평범한 진실이,

잔인하게 작동할 것이 뻔했다.


당시 고려군의 결도 장기 원정에 불리했다.

고려 말 군대는 국가군이라기보다 장수군에 가까웠다.

병사는 국고보다 장수 개인의 봉급‧양식‧전리품 분배에 의존했고,

안전 귀환도 장수가 보증하는 관습이 강했다.


장기 원정의 핵심 요건이 절대적 복종과 정규 보급이라면,

지휘‧보급‧보상 체계가 사병화된 이 군대는

구조적으로 장기전에 불리했다.

병참이 흔들리는 순간

군심은 가장 안전한 선택지,

곧 정지와 우회, 귀환으로 쉽게 이동한다.


외교와 정당성의 비용도 무거웠다.

북방 방어체계를 막 제도화하던 명과의 충돌은

외교 마찰, 경제 보복, 장기 국경 분쟁의

연쇄로 번질 수 있었다.


마침 한반도는 왜구의 장기 약탈로 피로도가 누적돼 있었다.

여기에 더해 명과의 전쟁으로 인한 손실항목이 커지면

지속 전의 명분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장기 점령일수록 내치 리스크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 위에

뻔히 보이는 우왕과 최영의 정치적 노림수가 덮였다.

개경은 이미 파벌 대립과 개혁 논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원정이 길어질수록

“누구에게 손해고, 누구에게 이득인가” 하는

원정의 정치적 배당을 둘러싼 다툼이 격화된다.


이런 판에서 현장 장수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는

단기적인 성과를 확보하고 체면을 지켜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마와 역병, 보급 지연이 겹치면

그 ‘합리적 선택’마저 어렵게 만든다.


위화도에서의 회군은 패주가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위험관리였고,

바로 그 합리성이 훗날 ‘회군’ 서사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성공의 여지는 정말 없었을까?

조건이 맞으면 제한 작전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현실적인 그림은 두 가지 작전개념으로 정리된다.


첫째, 단기 타격 후 즉시 귀환하는 정치적 시위형이다.

목표는 강 인접 거점 한두 곳의 파괴 혹은 불용화,

포로와 전리의 확보, 적 보급선 교란.

시간표는 전개 3~4일, 교전 36~72시간,

철수는 48시간 내.


이 그림의 핵심은 이견을 봉쇄하는 단일 지휘, 화살과 마초,

응급약품을 도하 이전에 강안에 미리 적치하는 전진 보급,

“목표 A와 B 달성 즉시 회군” 같은 철수 기준의 문서화와 상벌 연동,

가교 예비와 연막, 저지대 화공 대비 같은

후퇴로 안전망이다.


이렇게만 굴러가면 협상 테이블에서의 압박 카드와

국내 정치용 ‘성과 보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릴 수 있다.

다만 창—도하 가능 시간창—을 놓치거나,

예측 밖의 적 증원, 가교 파손으로 후퇴가 지연되는 순간

위험은 급상승한다.


둘째, 도하 후 얕게 체류하며

선별적으로 적의 주요 거점을 파괴하는 확장 억지형이다.

두세 개 성채의 방어시설과 식량창고, 교량을

선별 파괴한 뒤 후퇴한다.


이를 위해선 도하와 가교, 도로 복구를 책임질 공병 역량,

수인성 질환을 현장에서 선별‧격리할 야전 의무반,

측후방 교란에 즉시 대응할 기동 예비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체류가 1~2주를 넘기는 순간

병참과 질병 리스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이 개념의 원칙은 ‘얕고 넓게’가 아니라 ‘얕고 좁게’다.


반면 완전 점령이나 영향권 확대는

요구 역량이 과도하게 높다.

장마 속에서도 버티는 도로와 교량 정비력,

격일 주기로 숨을 불어넣는 상설 보급선과 야전 병원,

병력 교대와 후속 증원,

말과 곡물의 장기 징발을 가능케 하는 국내 ‘지속 동원 합의’

이 축들이 동시에 서야 한다.


그런데 1388년의 고려는 어느 축도 충분치 않았다.

가교 하나 무너지는 순간 철수로가 끊기고,

전술적 승리가 전략적 포위로 바뀔 수 있었다.


보급이 이틀만 막혀도 부대는 급속히 약해졌고,

질병을 현지에서 가려 격리할 제도와 자원은 턱없이 모자랐다.

내치는 왜구와 재정난, 파벌 싸움으로 이미 기진맥진이었다.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초반 대승으로 길을 열면?”


국지전 대승은 가능하지만,

요동의 넓은 공간과 성채망은

명에게 결정적 섬멸전을 피할 여지를 준다.

그리고 바로 대승 직후가 보급 공백의 시간이다.

그 틈이 역습의 창이 된다.


“여진 세력을 동원하면?”


일시적 협력은 가능하나,

장기 점령의 행정‧조세‧치안을

외부 세력에 의존하는 순간 통제 비용이 솟구친다.

지금 얻는 이득이 나중의 비용으로

되돌아오는 전형적 함정이다.


“차라리 가을에 건넜다면?”


저수위‧건기로 도하 창은 넓어지지만,

추수기 징발과 말 월동 사료 축적 같은

국내 경제 비용이 커지고,

겨울 전선의 피복‧난방‧연료라는

새로운 비용이 더해진다.

한쪽 창이 넓어지면 다른 창이 좁아지는,

균형의 법칙이 여기서도 작동한다.


결국 결론은 처음의 문장으로 되돌아간다.

1388년의 고려가 현실적으로 노려볼 만했던 유일한 그림은

“목표를 선명하게 좁히고, 짧게 치고,

질서 있게 돌아오는 제한 작전”이었다.


이를 가능케 하려면

“A 성의 곡창 파괴 및 포로 확보 후 72시간 내 회군”

같은 수치화된 종료 조건,

도하 이전 전진 보급의 사전 적치와 가교‧도로 예비계획,

단일 지휘와 상벌 연계,

그리고 “정해진 목표 달성 완료”라는

국내 정치용 메시지가 필요했다.


반대로 장기 점령과 지속적 영향권 확대는

공병‧병참‧의무‧내치 합의라는

네 축이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당시의 고려는 어느 축도 충족하지 못했다.


결국 많은 이들이 기대한

웅대한 대륙진출의 서사는 현실의 벽 앞에 부딪쳐

국가를 더 큰 위기로 몰고갈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한 구조적 열세가 회군이라는 합리적 선택을 낳았고,

그 선택이 훗날 국가의 진로를 바꾸는

정치적 전환점이 되었다.

돌아섬은 패배가 아니라 최선의 관리였고,

바로 그 냉정함이 위화도 회군 서사의 진정한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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