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넘어선 시간으로 그린 여성의 그림이야기
〈기억의 표면 No.1〉 Charcoal on Paper 2026. 02
이 초상은 특정 인물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시간 속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인상의 기억’을 기반으로 그려졌다. 작가는 사진적 정확성을 따르기보다, 손의 반복과 지우기, 번짐의 과정을 통해 기억이 형성되는 방식과 유사한 층위를 화면 위에 쌓아 올린다. 명확한 윤곽 대신 부드러운 경계와 미묘한 명암을 선택함으로써, 이 얼굴은 누구의 것이기보다 누군가였을지도 모를 존재로 남는다. 빠르게 생산되고 소비되는 이미지 환경 속에서 이 작업은 느린 시선과 물리적인 흔적을 통해 ‘보는 행위’가 아닌 ‘머무르는 경험’을 제안한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기록하려는 것을 넘어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바라보던 시간의 감각을 남기고자 한다. 오늘날 이미지는 너무 빠르게 생성되고 사라진다. 카메라는 정확하지만, 기억은 결코 정확하지 않다. 나는 이 불완전한 기억의 구조에 더 관심이 있다.
연필이라는 재료는 수정과 삭제의 흔적을 남기기에 적합하다. 문지르고, 지우고, 다시 쌓는 과정은 마치 우리가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선명함과 흐릿함이 반복되는 방식과 닮아 있다. 그래서 내 그림은 특정 인물의 재현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한 인상의 축적이다.
나는 사진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과잉의 시대 이후에 남을 수 있는 느린 이미지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 작업들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는 무엇을 정확히 기억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감각으로만 간직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 작업은 전통적인 초상화의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기억이 형성되는 시간적 과정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이 초상은 ‘얼굴’이 아니라 하나의 감각적 기록에 가깝다. 오늘날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미지를 소비하지만, 그 이미지들이 우리 안에 얼마나 오래 머무르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디지털 환경에서 생산된 얼굴들은 선명하지만, 그 선명함은 종종 경험의 깊이를 동반하지 않는다.
작가는 목탄과 연필이라는 물리적 매체를 통해 이미지가 생성되는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춘다. 지워진 흔적, 번진 결, 다시 덧입혀진 층은 기억이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반복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 느린 구축의 과정은 관람자에게도 동일한 시간을 요구한다. 작품은 한 번에 읽히지 않으며 시선이 머무르는 동안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작업은 어떤 인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방식’을 되묻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빠르게 소비되는 시각문화 속에서 이 초상은 재현을 넘어 체류의 경험을 제안하며 동시대 이미지 환경에 대한 조용하지만 분명한 대안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