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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혁재 Feb 14. 2021

영휘원과 숭인원

영휘원과 숭인원을 찾았다.

'어렵게 설득해 아들을 황태자 자리에 앉힌 지 겨우 4달. 이토 히로부미란 자가 나의 아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11살 어린아이를 볼모로 삼아 무엇하려고. 이복형을 두고 내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었는데 무슨 소용이었는가. 상궁에서 황귀비가 되었는데 망국의 황귀비는 하나뿐인 아들 하나 지키지 못하는구나.'*


1911년 58세의 나이로 엄 비가 죽었다. 일본은 장티푸스로 인해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자신의 아들이 일본 군대에서 힘들게 훈련을 받는 사진을 보다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가슴이 막혀서"** 숨을 거두었단 이야기도 있다.



273을 타고 국방연구원에서 내렸다.


국방연구원 정류장에서 영휘원과 숭인원을 찾아가려면 청량리역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세종대왕기념관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세종대왕기념관 부지를 왼편에 두고 긴 돌담길을 걸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세종대왕기념관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지판을 지나쳤다.


돌담길 반대편에는 높지 않은 건물들이 있다. 꽤 멀리 한신 아파트가 보였지만 다른 아파트들은 보이지 않았다. 청량리역 부근은 개발이 한창인데 이곳은 높아야 3층 정도 벽돌 건물들이 많다. 지방 시내를 걸어본 적이 있다면 그 향수를 일으킬 만한 풍경이다.


꽤 긴 거리의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주차장 입구가 보인다. 영휘원과 숭인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검표원을 지났다.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기 위해 표를 검사받고 곧장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소나무 사이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숭인원 언덕 위 봉분이 아주 조금 보였다. 언덕이 꽤 높다.


오랜만에 흙길을 밟았다. 질퍽한 부분도 더러 있다. 흙길을 따라 걸어 숭인원 홍살문 앞에 섰다. 홍살문이 만든 네모난 액자 안으로 정자각이 반듯하게 들어왔다. 정자각 양식이 눈에 확 들어왔다. 부채를 거꾸로 걸어놓은 듯한 풍판 모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자각에 다가서기 위해 홍살문으로 들어갔다. 잔디밭에 발을 내딛자 기분이 좋았다. 몇 발자국 걸었을까 정자각으로 곧게 뻗은 돌길을 마주했다. 향로라고 적혀있다.


"제향을 지낼 때 혼령을 위한 향이 지나가는 길 입니다. 밟지 마시고, 오른쪽의 낮은 어로(임금길)를 이용 바랍니다"   


옆에 낮은 어로는 없어 당황스럽다. 높낮이가 다른 돌길은 보이지 않았다. 향로를 옆에 두고 잔디밭을 걸어 정자각 오른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자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신계' 또 다른 하나는 '어계'. 향로처럼 신계는 혼령을 위한 계단이고 어계는 임금을 위한 계단이다. 신계는 계단 옆으로 구름을 오르는 듯한 장식이 함께 있다. 어계는 그에 비해 단조롭다. 계단이 밋밋하고 평범한 덕분에 오를 때 생각을 방해하지 않아 좋다.


숭인원 이야기


임금에게 올릴 물을 긷는 우물인 어정을 지나치면서 영휘원 언덕을 올려다봤다. 언덕 뒤로 소나무들이 포근하게 영휘원을 감싸고 있다. 멀리 봉분을 둘러싼 담인 곡장이 보이고 "분묘 앞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돌로 만들어 세운 네모진 등"***인 장명등과 사람 모양의 석조물 문인석이 보였다. 카메라 렌즈를 움직여 크게 보니 보다 모양이 선명했다.


영휘원은 의민황태자 생모 황귀비 엄 씨의 원이다. 숭인원 주인의 할머니다. 어려서 명성황후를 모시는 궁녀로 궁에 들어오지만 고종의 사랑을 받는단 이유로 명성황후가 궁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명성황후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엄 상궁은 다시 궁으로 들어왔다.


다시 궁에 돌아온 엄 상궁의 정치 감각은 아관파천에서 빛을 발했다. 궁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면 아관파천은 절대 실패해선 안 될 기회였다. 엄 상궁은 자신이 가장 믿는 궁녀를 불렀다. 자신과 고종이 한 가마에 타고 궁녀와 세자를 한 가마에 태웠다. 가마꾼과 궁궐 수비병을 매수해 정동에 위치했던 러시아 공관으로 무사히 이동했다. 아관파천은 힘없는 국가의 굴욕이자 설움의 역사지만 엄 상궁 개인의 삶에서 바라본다면 짜릿한 성공작이 아닐 수 없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 해에 엄 상궁이 아들을 낳으면서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 아들이 영친왕(의민황태자)이다. 이때부터 엄 상궁은 '귀인' 신분이 됐다. 엄 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순빈'으로, '비'로 신분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논문은 "엄비는 후궁이었지만 사실상 고종의 계비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말했다. 황후 자리엔 오르지 못했지만 황후의 지위에 미치는 황귀비까지 오른 그녀다.


영휘원 홍살문에 서니 숭인원과 다르게 향로뿐 아니라 어로도 정자각을 향해 뻗어있다. 둘의 높낮이가 다르다. 향로보다 조금 낮은 높이의 어로가 향로 오른쪽에 따라 나있다. 박석으로 만든 어로를 따라 걸어 영휘원 정자각 오른편에 다다르자 숭인원에서 보았듯이 계단이 두 개가 놓여있다. 신계와 어계.

어계를 올라 정자각 안을 들여다보니 제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놓여있다. 정자각 내부가 어두워 물건들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피진 못했다. 내부가 어둡기 때문일까 열린 뒷문으로 영휘원 언덕의 잔디 색이 화사하게 빛났다. 신계로 올라온 혼령은 저 문으로 나가 언덕을 오르지 않았을까.


자신의 남편과 상궁 시절 자신을 내쫓았던 황후는 남양주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는 옮겼지만 홍릉이란 이름은 남았다. 영휘원의 현재 주소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홍릉로인 이유다. 아들 의민황태자 원소도 남양주에 있는데 홀로 남은 엄 황귀비는 어떤 기분일까. 외롭지 않을까. 황후와 황귀비의 경계가 죽어서도 뚜렷하다.


주소지라도 영휘원길이라 바꿔줬음 어땠을까.



*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한 엄 비의 독백

**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논문 인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명등(長明燈)에서 인용




참고

한희숙 (2006).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45(2), 195-23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및 조선왕릉과 왕실계보 책자

조선왕릉 중부지구관리소(영휘원)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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