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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혁재 Nov 14. 2021

“익숙했었어”가 주는 말랑함

-힐링n차탐구

‘진짜 딱 맞춰 출발하네’


지방에 집이 있었던 탓에 동서울터미널에서 고속버스는 자주 탔다. 버스는 버스기사가 눈에 보이니까 정시에 출발하는 게 사람이 노력해서 시간을 맞춰가는 느낌인데 기차는 사뭇 다르다. 더 기계 같달까. KTX 외모가 풍기는 매끈함이 더 차갑고 딱딱하면서 인정이 파고들 틈이 없는 느낌을 줬다. 정시에 여지없이 출발하는 기차에 살짝 섭섭함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떴을 때는 차창 밖으로 옥계역이 보였을 때다. 동해바다가 보이게 선로가 깔린 탓에 정말 새파란 바다가 쏟아져 들어왔다. 굴곡 하나 없이 반듯한 수평선이 하늘을 가르고 파도는 해안선에 맞닿아 하얗게 부서졌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꽤 오랜 기간 봐 온 바다다. 바다가 주는 시원함 모든 감상을 압도하지만 익숙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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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고학년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창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집이었다. 베란다엔 이전 집에서 가져온 낡은 남색 빛깔의 가죽 소파를 하나 두었다. 한 명만 앉을 수 있는 꽤 오래된 작은 소파였는데 미국 영화에서 나오던 난로 옆 흔들의자가 부럽지 않았다. 그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는 뒤로 푹 빠지고 팔은 자연스럽게 팔걸이에 얹히는데 세상 편한 자세로 바다를 시청할 수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동안 새파란 자연경관이 주는 시원함이 지나가면 여지없이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기억들이 하나 둘 올라온다. 바다가 반가운 이유는 어느 시점부터는 익숙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힐링의 순간


기차 여행이 목적은 할머니 집 방문이다. 동해역에 내려 줄지어 선 택시 하나를 골라 기분 좋게 집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과 풍경 투성이다. 아파트나 빌딩도 없고 사람도 없다. 운이 좋아 맞은 평5까지! 어지럽던 직장 생활을 잊기 딱 좋은 공간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이 ‘내 새끼’를 대하는 할머니와 이모의 대우는 몸이 훌쩍 커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를 방바닥에서 뒹굴거리게 하는 최고의 기폭제다. 메주를 쑨다는 '업무'가 하나 있었는데 생각보다 재밌다. 솥에 삶은 콩을 포대에 넣어 옥상으로 올려 발로 꾹꾹 밟았다. 얼마 만에 올라온 할머니 집 옥상인가. 아마 그땐 지금 눈높이는 아니었을 터라 한 블록 떨어진 놀이터는 안 보였겠지.


조금 일했지만 보상은 푸짐하다. 토종닭 튀김에 지역 농협에서 맛볼 수 있는 지역 특산 막걸리까지. 할머니가 평소 끌고 장을 봐오던 조그마한 구르마에 먹을거리를 숨긴 봉투 여러 개를 포개고 돌아왔다. 쉼 없이 먹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여유가 아쉬워질 무렵에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울컥 솟아오르려는 걸 애써 막았다. 할머니 집이 주는 행복은 무얼까 생각하면서 다시금 힐링에 집중해보자.


생각의 결론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적응할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이다. 할머니 집이란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은 늙거나 낡아갈지 몰라도 그 공간에서 이뤄지는 감정의 교류라든지 행위라든지, 이른바 물리적 화학적 케미스트리는 변함이 없다.


나를 먹이는 것이 중요한 할머니, 나와 대화하는 게 즐거운 이모.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내 역할과 사고는 어제에 이곳에 왔어도, 한 달 전에 왔어도, 1년 전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변함없는 한 시점과 수준에 멈춘다.


사회 초년생이 느끼는 절박함은 어느 공간에서든 적응해야 한단 압박감에서 나오기도 하는데 적어도 그 걱정 고민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이유다.


두 번째는 내가 가진 정체성을 꾸준히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는 확신이다. 앞서 바다가 그랬듯, 이 공간에 들어오는 순식간에 가족 공동체 안으로 내 정체성이 빨려 들어간다. 직업, 학업, 능력, 경쟁에서 벗어나 오로지 고민은 '내게 넘겨진 이 고봉밥을 다 먹을 수 있는가.' '할머니가 혼자서 장을 보러 가면 가는 길이 위험하진 않을까.' 등이다.


새롭게 느껴지던 이 정체성이 시간이 지날수록 본래의 정체성이었단 걸 느끼게 되는데 비로소 할머니에게 밥을 남기겠단 투정을 부리거나 바닥 장판과 물아일체가 될 수 있다.


 정체성을 파악하게 되는 순간, 그때의 삶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는데 꽤나 내가 행복하게 살았구나란 걸 자각하기 충분하다. 그 자각이 곧 힐링의 순간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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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 결과

내일 출근 심지어 새벽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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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여자 친구하고 같이 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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