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 누나 자취방. 침대와 냉장고 사이에 공간이 있었는데 보통 여기서 식탁을 펴고 밥을 먹었다. 편안하게 살던 누나의 집에 들이닥친 불청객. 용도가 불명확한 이 공간에 요를 깔고 눕는 것도 호사다. 어찌 됐든 눈치만 안 보면 안락한 이 공간에서 돈 벌 궁리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구인 광고를 열심히 찾다가 학원 사무직 공고를 보고 곧바로 지원했는데 점점 더워지는 계절에 에어컨 빵빵한 학원 데스크만큼 시원한 직장은 없겠다 싶었다.
노동을 제공하고 받는 대가가 이렇게 달콤하다는 것도 에어컨 밑에서 처음 깨달았다. 부끄럽지만. 과외와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 하루하루를 전전하다 120만 원이 넘는 월급을 처음 받아봤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든든하다. 취미 생활에 과감히 투자했다. 중고 DSLR 카메라를 샀는데 조작법도 쉽고 무게도 가벼운 일반 디지털카메라는 절대 사지 않겠단 그때 각오가 참 모순적이다.
'그냥 디카보단 아날로그 감성이 있잖아!'
출처=여자친구
조리개, iso, 셔터 속도, 초점 ...
사진을 찍기 위해 일종의 설정들을 맞춰야 하는 DSLR을 그나마 필름 카메라와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DSLR이란 '글자'만 봤을 땐 납득이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DSLR의 'D'는 'Digital'의 'D'인데, '아날로그'가 곧 '디지털'의 대척점이라 생각하면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워 DSLR을 사겠다고 내린 결정은 조금 오류가 있어 보인다.
물론 DSLR과 SLR의 카메라 구조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라 자세한 내용은 잘 몰라서 패스. 그래도 나름 방어할 논리가 있었는데 사진을 찍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온전히 기계에만 맡기는 게 아니라 빛이 들어오는 양을 직접 조절하고 초점도 맞추고 렌즈도 바꿔가면서 더 넓은 범위를 찍거나 배경을 날릴 수도 있고 하는 재미들이 있으니까! 때문에 그 이름에 디지털이 있다 해도 그가 가진 아날로그 감성은 신기루 같진 않았다.
이 날의 경험은 이미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뒤섞여버린 시대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이해하고 탐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했다. '디지털'이 가진 범주를 살피고 상대적으로 무엇이 아날로그적인가를 따져야 한단 생각으로 이어졌다. 가령 콘서트장에서 음악을 듣는 일이 아날로그라면 CD 플레이어가 디지털이고 CD플레이어에 꼽은 이어폰을 MP3에 꼽는 순간, CD플레이어는 이제 아날로그가 되는 것처럼. 또 MP3와 스마트폰을 비교하는 순간 이어폰을 뺏긴 CD플레이어는 역사책 첫 몇 페이지 정도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힐링의 순간
"아날로그란 언어도 사회에서 광의적인 개념으로 쓰고 있다고 보면 된다. 즉 아날로그의 개념은 디지털 이전의 기술이나 물리적인 시스템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단순한 정의 차원이 아니라, 디지털 패러다임의 기계적인 부분 및 과학적인 부분과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상대적인 개념이란 (주관적인) 잣대를 최근에 한 번 더 들이밀었다. 언제나 방송할 때면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쇼미 10이 그 대상인데, 베이식이 부른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란 곡이 첫 월급봉투 받던 날 느꼈던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집착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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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다닐 즈음 '페스티벌'이란 행사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시작했다. 유명 락, 팝 가수들 여럿이 야외에 설치된 무대에 오르면 관객은 들판 같은 곳에서 자유롭게 음악을 듣는 분위기. 그때 즈음 오아시스니, 그린데이니, 뮤즈니 유명 록 가수들 내한 공연 소식들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때 접했던 음악을 쉽게 밴드 음악이라고 불러 본다면, 고등학교를 다닐 때 즈음됐을 땐 방송 프로그램들이 밴드 음악을 소재로 활용하면서 10대, 20대의 대중적인 선호와 매니악한 선호 모두를 반영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M.net '윤도현의 must'나 지상파 'top밴드' 정도가 예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도 밴드 음악에 빠져 환호했다.
'학창 시절 향수'라는 반칙이 밴드 음악에 대한 개인적 평가에 덧 씌워졌다. 하지만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록 페스티벌 인기는 점차 EDM 페스티벌로 옮겨 갔고, 록 음악 보단 힙합 음악이 젊은 세대가 주로 향유하는 장르가 됐다. 물론 밴드 세션이 악기를 연주하는 행위나 힙합 공연에서 DJ가 장비를 다루는 행위 자체는 사실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기타와 키보드 드럼을 사람이 무언가를 들고 (피크라든지 드럼 스틱이라든지) 치고 두드리는 모습이 연출되는 밴드 음악이 비교적 인간적인 모습을 띠다 보니 같은 전자(디지털) 음악이라 해도 힙합보단 인간스럽게 보이는 면은 있다. 적어도 '아 저 연주자가 뭘 눌러서 소리가 깔리는구나'라는 생각을 시각 정보가 일련의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쇼미 10에 나온 곡들에 밴드 사운드가 섞인 비트가 꽤 되고 좋은 노래도 물론 많지만 유독 베이식의 노래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짙게 느낀 이유는 뭘까.
쇼미 10에 나온 곡들 중에 무대에 밴드를 올린 곡은 많지 않았다. 베이식 무대가 몇 안 되는 그중 하나인데 무대에 밴드를 올린 뒤 연출이 또 기가 막히다. 베이식의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에서 랩핑이 끝난 뒤 훅이 나오는데, 강해지는 기타 사운드에 맞춰 동시에 무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든다. 무대를 뛰어다닌다거나 점프를 강하게 하지 않고 상반신만 박자에 맞춰 아래 위로 흔든다. 기타리스트의 팔은 줄 위에서 내려갔다 올라왔다를 반복하고 세션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는다. 오래전 락 공연에서 보던 모습들이 겹쳐졌다. 무대 전체를 비추는 풀샷은 전자 음악이란 범주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찾을 수 있게 배려해주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출처=Mnet 유튜브
환호했던 그때의 향수가!
이 아날로그 형식에 베이식의 가사가 더해졌다. 단어를 쓰고 읽는 게 이제 쑥스러워진 "꿈"에 대한 가사인데 가사를 읽으면서 노래를 듣다 보면 과거에 빠져드느라 아득해질 때가 있다. 학교를 다닐 땐 대학이, 대학을 다닐 땐 직업을 갖는 게 꿈이었는데 직업을 얻으면서 꿈을 설정할 필요성과 방법을 잊었다. 멀리 볼 새가 없다. 차라리 하고픈 일을 꿈꾸던 백수 직전 취업생 신분이던 때가 더 빛나던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회사라는 다른 길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결국 랩을 위해서 자신을 다그쳐온 40을 바라보는 래퍼가 내뱉은 꿈에 대한 회상이 밴드 사운드와 겹쳐지면서 한층 더 강하게 꿈을 꾸던 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앞서 인용한 내용처럼 아날로그가 기계적인 부분의 반대를 뜻하는 광의적인 표현이라면 이 노래의 가사는 인간적인 무언가에 다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사가 품은 꿈이 가장 인간적인 이유는 뭘까. 베이식의 삶에서 살펴보자. 유명 패션기업 마케팅 팀을 떠나 음악을 하고 싶다고 가정을 설득했다. 불확실한 성공 가능성을 버텨내고 ‘우승하고 뜨지 못한 래퍼’란 사실을 굳이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고난과 시선을 견딘 건 그 낯간지러운 단어 덕분이었을 텐데 인간만이 가진 가장 인간스러운 원동력 아닌가.
내 기억 속 강하게 자리 잡은 밴드 음악에 대한 향수와 인간은 스스로 연료를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말하는 가사. '꿈'을 기가 막히게 나에게 인식시키는 데는 베이식의 노래가 아날로그로 두텁게 덧칠했기 때문 아닐까.
##탐구 결과
-멜론 플레이스트 최상단 한 곡 반복
"근데 베이식 결승 못 갈 것 같아"
진짜 못 갔네 이식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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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적 감성 및 디자인 요소에 관한 고찰 : 건축 공간을 중심으로". (김소연, 김승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