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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Aug 01. 2020

잡을 수 없는 꿈을 따라 어서 움직이자

처음으로 야한 영화를 본 건 28살. 처음 자취를 시작한 때다.

내가 구상한 소년의 이야기는, 그들이 아직은 변화할 가능성이 많은 존재이며, 그들의 정신상태가 어떤 방향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다는 데 주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미처 가치관이나 라이프 스타일 같은 것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중요시했습니다.
...
그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는 지난날의 카프카가 아닌 또 다른 소년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 성숙한 단계로 진입한 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보내는 메시지 중에서





내 언젠가 야한 영화를 보겠다 결심했다. 그렇게 처음 야한 영화를 본 건 28살. 처음 자취를 시작한 때다. 집에서 보자니 부모님이 신경 쓰여 볼륨을 높이다 줄이다 반복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렇다고 영화관에서 보자니 매표소 앞에서 민망했다. 여기 가.. 간.. 아니에요. 매드맥스 1인이요.

자취하기 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당연히 20살이 되면 할 줄 알았던 것들 중 어쩌다보니 늦어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야한 영화가 그렇고 여자 친구가 그런 것 처럼...


그렇게 처음 자취를 시작하고 보게 된 영화가 <아가씨>다.

금요일 늦은 밤. 침대에 누워 맥주 한 캔과 함께 한 영화.


막상 <아가씨>를 야한 영화라 소개하니 미안해진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그냥 '야한' 영화로 소개하고 끝내버린다고? 비싼 코스 요리 열심히 다 먹고나서 '아. 이렇게 먹으면 살찔텐데'라고 말해버리면 힘들게 요리 만든 주방장에게 미안하고 계산대 앞 내 지갑에게 미안하다. 그보단 ' 음. 이번 와인의 바디감이 참 좋았어. 요리랑 딱 맞는 와인이었지'라고 하는 게 좀 더 으른스럽지 않나 싶다. 그렇기에 <아가씨>를 그냥 야한 영화라고 해버리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무래도 '야한 영화 보기' 위시리스트는 잠시 체크를 보류하기로 한다.(내 언젠가 정말 야한 영화를 보게 될 때 그떄 위시리스트에서 지워야지. 정말이다. 내 언젠간 성공하리.)


<아가씨>영화를 좋아한다. 그건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푸딩보단 씹고, 뜯고, 맛보고 아주 질겅질겅 씹어야 하는 마른 오징어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상징으로 시작해 상징으로 끝나는 영화. 그러니 영화 뒷담화 하기 딱 좋은 영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마른 오징어를 가끔은 물에 불려 먹는 걸 좋아하는 나는 이번에도 내 마음대로 영화를 해석해본다.(논리적 비약과 수많은 소거법으로 진행되는 야매 영화 애호가다)


좋아한다는 걸 '좋아해' 말해버리면 시시하고, 야한 걸 '아이 숭해라' 말해버리면 김 빠지는 것 처럼 적당한 불친절함은 영화를 더 즐겁게 만든다. 박찬욱 감독은 그런 면에서 참 친절한 감독이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영화를 만들지도 않는다. 딱 박찬욱스럽게 만든다. 이번에도 여전히 영화에는 발이 나온다. 신발 짝을 잃어버리고, 새 신발을 신는다. 손도 나온다. 검은 가죽 장갑, 손가락을 묶던 반지 또는 하나씩 잘리는 손가락 등등. 이 영화는 손과 발에 대한 영화다. 무엇을 쥘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까지 가야 잡히지 않을까.


영화는 총 3부로 나뉜다. 숙희, 히데코의 시점에서 나오는 1,2부 그리고 그 둘이 함께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지는 3부. 관객은 제1부에서 숙희의 시점으로 영화를 바라보고 상황을 파악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계속 진행되도 관객은 쉽게 숙희의 시점에서 나오기 어렵다. 17세의 숙희. 하루키에 따르면 가치관이나 라이프 스타일 같은 것이 확립되어 있지 않는 나이. 그녀의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 속 정보들이 바로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다. 그러니 감독은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세계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우리는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숙희란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모노산달로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다. 모노산달로스를 직역하면 '신읠 한 쪽만 신은 사나이'란 뜻이다.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상징이다. 한 쪽 신발만 잃어버리거나 발이 웅덩이에 빠지거나 하는 것은 현재 주인공의 불완전성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는 성장영화가 된다. 주인공은 과연 어떻게 완전성을 찾아가는가. 그것이 감독이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이다.


제 1부에서 숙희는 히데코 아가씨를 모시러 가게 되고 그곳 하녀들의 장난으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채 히데코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숙희는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어떻게 찾게 될까? 그 답은 의외로 바로 나온다. 숙희의 신발이 없는 것을 본 히데코는 자신의 신발장을 열어 원하는 신발을 가져가라 한다. 숙희의 성장은 히데코를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숙희. 일본인이 되고 싶은 한국인의 일본 가옥에 들어가 타마코가 된다. 아가씨를 정신병동에 가두고 재산을 가로채려는 백작과 한패가 되고 히데코를 속이기 위해 자신을 감춘다. 그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숙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어른들의 방식. 저택 깊은 곳에 있는 서재. 무지한 자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서재. 어른들의 공간. 숙희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세상은 숙희를 타마코로 만들지만 숙희는 어른들의 욕망을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숙희는 그렇게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다면 히데코는 어떻게 숙희를 도울 수 있을까. 그 답은 다음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너는 내가 꼭 그분과 결혼했으면 좋겠어?

숙희는 자신이 히데코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17세 소녀. 그녀의 세계는 딱 거기까지다. 자신 중심의 세계. 모든 것은 자신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아이. 히데코는 과연 서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히데코는 그런 숙희를 바라본다. 숙희는 히데코의 발을 다듬는다. 숙희가 다가갈 수 없는 신분. 발은 앞날의 가능성을 가진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그리고 숙희의 결정은 다음 장면에서 나온다.



숙희야. 내가 걱정돼? 나는 네가 걱정돼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히데코의 발을 잡을 때 히데코는 숙희의 가면을 벗긴다. 히데코. 남자의 욕망에 둘러싸여 도망가지도 못하는 운명. 자신의 세계는 이 저택이 전부인 히데코. 그녀는 어른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자이다. 어찌보면 소수. 약자. 그런 그녀가 숙희의 가면을 벗긴다. 속은건 너야.


히데코는 자신의 숨겨진 진짜 삶을 보여준다. 17세 숙희.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가 아직 보지 못한 것. 어른들의 폭력성, 욕망. 숙희가 히데코를 속일 수 없던 것은 무지다. 책으로 둘러 쌓여 있고 뱀이 놓여 있는 서재. 그곳은 권위를 쌓아 어른의 폭력과 욕망을 감춘곳. 숙희가 그 서재에 접근하지 못한 것은 아이가 어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히데코는 숙희에게 서재를 보여준다.

숙희는 서재의 진실에 분노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도망친다.

히데코는 말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물론 신발을 준 것은 숙희가 아닌 히데코다. 정신병원에 갇힐 운명에서 구한 것도 히데코다. 하지만 그런 히데코는 숙희가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한다.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는 숙희. 분노할줄 알고, 자신의 감정을 따를 줄 아는 숙희. 그건 기존의 룰이 아니다. 그것이 히데코에게 구원이다.


정신병원에 갖힐 뻔 한 숙희는 히데코를 통해 운명을 피하며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성장하며 본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어른들의 비상식적인 권위와 권력의 허구성 아닐까. 히데코의 이모부가 어렵게 모은 책들을 찢고, 먹칠하고 버리는 숙희. 그건 히데코의 정해진 운명 같은 피할 수 없던 것이었다. 하지만 숙희는 충분히 파괴하고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같이 담을 넘는 것과 같다. <아가씨>는 표면적으론 퀴어 영화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야한 영화라고 말할 수 없는 건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은 사회 규칙,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겠다는 하나의 표현이지 않을까. 히데코는 숙희를 돕지만 동시에 자신을 구한다.



영화는 숙희가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사람은 끊임 없이 성장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끊임 없이 무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같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쓰면서 "이 소설은 나 자신이며, 독자여러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15세의 소년의 성장하는 모습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는 히데코와 숙희가 장갑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사실, 그 후에 한 씬이 더 있지만 생략하도록 하자)  물론 그들의 앞날이 밝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달밤에 도망쳤고, 달밤에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다. 누군가와 정면으로 싸워 이긴 것은 없다. 그러나 밤이 가고 다시 낮이 되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듯, 또 다른 날은 시작될 것이다. 적어도 햇볕도 들지 않던 이모부의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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