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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구 Jul 04. 2020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택시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이번 여행은 느낌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굳게 믿으며 눈을 감았다.

한 놈만 걸려라. 내가 진짜 보여줄게. 

그게 뭐든 일단 걸려라. 

내가 가지고 있는 다 줄게.

.

어...?

진짜로 됐다.




[중소출판산업활성화 지원사업]에 당선되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열심히 살게요. 하고 싶었던 거 진짜 많았는데 열심히 덕질해 볼게요. 아! 전주로 협약식 맺으러 오라고요? 어휴. 당연히 가야죠. 전주를 제가 또 사랑하거든요.


 대전에서 전주로 자주 여행을 갔었다. 그땐 대부분 한옥마을 근처에서 놀았다. 대학생 때다. 아마 한 시간 조금 넘으면 도착했던 곳으로 기억한다. 뭐, 한 시간이면 대전에서 서울도 KTX 타면 갈 수 있는 시간인데 전주 정도야 옆 동네라고 생각했다. 


요즘 MBTI가 유행이라고 하던데 유형별 길 잃었을 때 특징도 있다고 한다. 

나는 스트레스받는 정도에 따라 INFP랑 ENFP 두 개를 왔다 갔다 하는 편이다. 위에 길을 잃었을 때 특징과 연관 지어 보면 '다시 길을 돌아가려고 하지만 어디로 왔는지 기억나지 않아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 감'정도가 되겠다. 그러니 나는 천성적인 길치의 운명이다. 누가 그랬다. '자신이 틀린 길을 가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자가 진정한 길치라고' 그런 면에서 나는 어쩔 수 없는 길치다. 문제는 내가 길을 잃고 있단 것에 어느 정도 불안감을 가지면서 발길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


협약식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두 시에 있다고 했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대전 정부청사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할 때 맞은편에 있던 택시기사 아저씨 중 한 분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나도 웃으며 고개 인사를 했다. 택시 아저씨에게 나는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고향으로 가는 사람이었을까. 불명확한 관계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은 로맨틱한 휴머니즘과 같았다. 오늘은 느낌이 좋다. 잘 될 것만 같다.


모든 게 좋았다. 매번 길 잃던 내가 웬일로 한 시간 전에 이미 협약식 장소에 도착했다.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며 걷다가 '고기국수'라고 쓰여있는 집을 발견했다. 뽀얀 국물에 수육이 올라간 고기국수. 또 그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지. 그러나 주문한 고기국수는 잔치국수 옆에 고기 한 접시가 함께 나왔다. 아. 그렇지. 이것도 고기국수가 맞지. 정확히는 고기 '띄고' 국수. 그래도 그것 나름 괜찮았다. 멸치국물의 개운함도 나쁘지 않지. 오늘은 모든 게 잘 될 것만 같은 날이니까.

고기국수가 가끔은 고기 옆에 국수란 뜻일 수도 있다.


협약식에서도 별문제 없이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었다. 도장도 잘 찍었고, 인사도 잘했고, 명함도 주고받았다. 협약식 시작이 조금 늦어져서 예상 종료시간보다 조금 많이 딜레이가 된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은 저녁에 참치를 먹을 예정이거든. 예전 선배 기자님들과 저녁을 먹을 예정이다. 그래. 저녁이 참치인데 이정도 딜레이는 화낼 일도 아니지. 저녁에 참치 먹을 건데.


중소출판산업지원계획으론 대전 마을을 방문해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을 계획서로 냈었다. 그리고 책을 만들고 그와 관련된 전시도 열 계획이다. 사업 담당자는 재밌을 사업인 것 같다며 계획서 내용을 칭찬해줬다. 그럼요. 그거 다 제가 썼는걸요. 원고 마감 하루 전 날, 얼마나 이 악물고 썼는지 몰라요. 칭찬 한 방에 기분이 확 들뜬다. 협약식은 잘 마쳤고, 시간은 꽤 충분히 남았고, 돌아가는 길에 수변공원이 있었다. 조금 걷고 싶었다. 맨날 한옥마을만 왔다 갔다 했는데 이런 큰 공원이 있을 줄이야. 사방에서 벌레 소리가 들리고 새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저 강 건너로 월드컵경기장이 보였다. 경기장 맡은 편엔 대전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목적지가 눈에 보이는데 그럼 걸어서 가보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왜? 라고 물으면 답해줄 말은 없다. 그저 MBTI에 기대어 말해보면 ENFP가 갑자기 내 머릿속을 쥐고 흔들었다고 밖엔...

월드컵경기장까진 40분이 걸렸다. 버스 타고 올 땐 10분 정도였는데... 역시 인류가 바퀴를 발명한 건 대단한 발명이었던 거다. 시간은 5시 40분. 지금부터 대전까진 1시간 20분 안팎이다. 나의 참치 약속은 안전할 것이라 생각하며 매표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얼마나 힘없이 무너지곤 하던가. 대전에선 15분마다 있던 버스가 전주에선 한 시간 간격으로 있었다. 나는 영락없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방금 대전으로 가는 버스가 떠났거든...


이 비보를 얼른 대전에 전했고 기자님들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그냥 천천히 오라고 했다. 길 잃고, 헤매는 것을 한 두 번 본 분들이 아니지. 처음 입사했을 땐 깔끔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가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다짐은 또 얼마나 쉽게 무너지던가. 그냥 그다음 버스를 타고 가겠다 했고 나는 6시 40분 버스를 예매했다.

예상외의 현실 속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정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카페가 있다. 밖에는 비가 오고 나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처량하게 비를 맞으며 우수에 찬 눈빛과 젖은 머리로 대전에 갈 뻔했지만 그래도 근처에 카페가 있었으니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오늘도 나는 충동적인 ENFP와 소심한 INFP사이를 오가며 하루를 보냈다. 갑자기 왜 나는 걸어서 정류장까지 갔으며 또 버스를 놓쳐서 전전긍긍했는가. 열 시에 출발한 오늘 일정은 대전에 아홉 시에 도착하며 끝났다. 전주에는 비가 왔고 생각보다 버스는 늦게 도착했다. 아홉 시에 도착했으니 당연히 참치 파티도 끝나 있었다. 나중 정말 맛있었다는 이야기만 들으며 나는 상상으로 김에 무순을 올리고 참치를 싸 먹는 상상을 하는 것으로 하루 저녁을 마쳤다. 오늘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소설가는 정말 편한 직업이라고 누가 그랬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좋은 거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글로 쓰면 된다고 했다. 그러니 나도 글을 쓸 수밖에. 전주는 생각보다 넓고 버스는 미리미리 시간을 알아보고 타라는 교훈도 함께 남기며.



그래도 착한 기자님들.

배고프지? 하면서 밥 한 공기 사주니 나는 이것으로도 족하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다만 그 운이 오늘 오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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