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구 Jul 19. 2020

나는 너에게 다를 줄 알았어

영화 <박쥐> 내 마음대로 리뷰

나는 다를 것이란 생각은 또 다른 미련을 남긴다.
그 끝을 붙잡아 나는 다를 것이라며 여러 핑계를 찾는다. 나는 너와 다를 것이라고. 

나는 그때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던 결국엔 우리는 똑같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2009년도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2009년 6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분에 진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에밀 졸라의 책, <테레즈 라캥> 스토리에 뱀파이어 소재를 섞은 영화로 원래는 <테레즈 라캥>과 뱀파이어 소재 영화를 따로 각색해 만들 예정이었으나 스토리 제작 중 두 소재를 하나로 합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영화 내용의 큰 흐름은 <테레즈 라캥>과 같습니다. 주인공은 친구의 아내와 불륜에 빠지고 그녀와 함께 친구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극 중 인물이 사건을 저지른 후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며 그 동기가 무엇인지를 뱀파이어가 가지는 운명적 한계와 함께 다룹니다. 영화에 대한 평은 극과 극으로 나뉘는 편이지만 그와 상관없이 박찬욱 감독은 스스로 제일 만족하는 영화라고도 합니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게 될 거 같습니다.


신발을 신으며 시작한 영화. 신발 한 짝을 벗으며 끝이 난다.


박찬욱 영화는 영화 속 소재의 의미를 찾는 재미가 꽤 쏠쏠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서도 나왔던 소재입니다. 바로 신발을 통한 상징, '모노산달로그'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신을 한쪽만 신은 사나이' 정도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신화나 영화, 책에서 자주 나오는 소재인데 한 짝 신발만 신고 있으면 절뚝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거나 벗게 되는 것은 주인공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주인공이 어떻게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지하고 극복해 나가려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신발을 신으며 시작한 영화가 신발 한 짝을 벗으며 끝이 난다'라는 의미는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 그 누구도 완전해지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끝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구해줄게요.



영화의 갈등은 주인공이자 뱀파이어가 된 가톨릭 신부, 상현이 옛 친구 강우의 집에 초대받으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현은 강우의 아내, 태주를 만나게 됩니다. <테레즈 라캥>이 영화 원작이라 하니 상현은 태주와 함께 강우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상현은 강우를 죽이는가'가 영화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후 강우네 집에서 자란 태주. 그녀는 밤마다 몽유병인 척, 속옷 차림에 맨발로 밤거리를 뛰어 다닙니다. 태주는 맨발로, 결국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뜀박질을 합니다. 즉. 태주의 신분은 '불완전'입니다. 부모가 없고, 강우와 부부로 살지만 함께 '산다'는 모습보단 강우에게 '구속'되어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붙어 있는 운명입니다. 그것은 한복집에, 강우에게, 그리고 그녀 운명 자체에 말입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상현. 상현은 가톨릭 신부입니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전제로 합니다. 현재의 상황은 불완전하다 알려주며 구원하여 완전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종교의 속성입니다. 그런 종교적 삶을 선택한 상현이 태주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엔 종교적 의무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자신의 종교적 의무로 스스로 속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이 지옥에서 구해줄게요.

상현은 맨발로 밤거리를 뛰어다니는 태주에게 자신의 신발을 신겨줍니다. 불완전한 그녀를 구원하겠다는 상징입니다. 특이한 것은 자신의 신발을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희생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일부로 만들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상현은 신부도 인간도 아닌 뱀파이어입니다. 

상현이 강우를 죽인 것은 일차적으로 태주를 구원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그리고 구원에서 끝나지 않고  소유욕이 그 뒤를 따릅니다. 그 소유욕은 강우에게서 태주를 빼앗는 폭력성으로 나타나게 되고, 상현은 강우를 검은 물속에 
익사시킵니다. 
물에 빠져 죽는 것은 근본적으로 깊이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어느정도까지 잠기면 죽게 되는가. 이건 깊이의 문제입니다. 깊이를 느끼게 하려면 카메라는 인물을 수평에서, 인물의 시선에서 찍어야 합니다. 그러나 강우가 빠지고 상현이 올라오기까지 카메라는 수직적으로, 공중에서 찍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강우가 죽기까지 얼마나 괴로웠을지, 또 어떤 식으로 상현이 강우를 물속에서 어떻게 죽이는지 알 수 없습니다. 딱 그만큼, 관객이 느끼는 그만큼이 상현이 느끼는 강우의 죄책감입니다. 하지만 그 죄책감은 점차 매트릭스에 물이 차듯, 무거워집니다. 죄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무거워집니다. 


상현은 태주를 물어 뱀파이어가 되게 합니다. 그것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상현이 선택한 방법입니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죄책감과 불완전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상현은 태주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려 했다 해석을 하면 너무 멀리 나가는 걸까요? 이왕 멀리 나간 거 끝까지 한 번 가봅시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상현 _ 그럼 우리가 뭐냐?

태주 _ 뭐긴 뭐야. 인간 잡아먹는 짐승이지


태주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표현합니다. 뱀파이어. 피를 끊임없이 마셔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종교적으론 대속의 의미와 같습니다. 제사를 통해 동물의 피를 뿌려 자신의 죄를 사하는 종교적 의미 말입니다. 종교에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의미는 단순히 삶을 지속한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가 있음을 상기함으로써 언젠가 다가 올 완벽을 기다리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상현과 태주. 그들은 남의 피를 마심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지만 그렇게 지속되는 삶은 누군가의 구원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상현은 가톨릭 신부로서 삶을 버렸고, 태주는 인간을 잡아먹는 짐승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둘은 종교적 구원도 인간의 이성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버립니다. 종교적 대속이 결국 절대자에게 다가가기 위함이었지만 상현과 태주는 그 어디로도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 둘은 차를 타고 멀리 도망칩니다. 그렇게 그들이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그늘이 없는, 태양을 피할 수 없는 바닷가 절벽입니다. 모든 태초의 시작점인 바다에서 그들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이 모든 사건의 마지막에 태주의 신발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며 끝이 납니다.

신발 한 짝을 다시 잃어버리며 영화는 이들의 삶이 불완전으로 끝났음을 말합니다.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돕고자 했던 상현. 그러나 그도 결국 누구 하나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밤마다 강현의 입에 쪽가위를 넣었다 뺐다 하며 자유를 꿈꿨던 태주는 힘을 얻자 자신 또한 누군가를 구속하고 제압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 힘과 권력은 누군가를 해방하거나 돕지 못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누구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특별해져서 구원할 수 있을 거란 착각. 하지만 결국 우린 모두가 불완전하기에 누구를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그저 함께 어깨를 기대며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쥐는 그렇게 끝납니다. 천장에 매달려 거꾸로 보는 세상도 결국은 같은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이 가끔 위안을 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도울 순 있어도 구원해줄 수 없다는 생각은
극한에 수렴하듯 더욱 순간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 택시 아저씨가 손을 흔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