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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 Aug 06. 2022

내몰린 어른이 읽는 동화

천선란 《천 개의 파랑》을 읽고

동화의 본래 기능 중 하나는 어린이에게 세상의 위험성을 알리는 데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전래동화 중에는 원작의 내용이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한 것이 많았다고. 그런데 이미 인간 세상을 겪을 대로 겪어본 어른에게 동화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바로 어른이 된 시점에 어릴 적 간직했던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천 개의 파랑》은 비현실적이다. 단순히 장르가 SF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작가가 그려낸 인물이 하나같이 가슴이 아릴 정도로 맑다. 소방관인 남편과 사별한 뒤 매일 새벽까지 식당 일을 하며 두 딸을 키워낸 보경이 있고, 그러한 엄마 밑에서 최대한 짐이 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큰딸 은혜와 작은딸 연재가 나온다. 관절이 아픈 말 한 마리의 생존권을 자신의 일자리보다 우선시하는 복희와 민주와 서진이 있다. 주인공인 '콜리'라는 로봇조차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고 말할 정도로 착하기만 하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무해하고 무결한 인물들이 엮였기에 결국 '동물과 인간과 로봇의 공존'이라는 이상향은 소설 속에서나마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이토록 선한 세계를 읽는 내내 동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동시에 최근 내가 빠른 속도로 잃어가는 것을 작가 오롯이 간직한  같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미래를 향한 낙관이다. 불과 어제 일이다. 가까운 지인이 카톡으로 유명한 시를 하나 보내줬다. 그는 내가 몸과 마음을 소진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터라 위로하고 싶어 했다.


사막 - 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나는 어차피 모래폭풍이 불어닥치면 발자국은 금세 사라질 것이고, 그는 또다시 고독하게 버티며 나아갈 것이라고 답장했다. "염세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부러 덧붙이진 않았지만 '여유가 있어야 기껏 사막까지 가서 외로울 수 있는 것 아닌가'하는 한층 나아간 염세적인 속말도 했다.


둘째는 나보다 성숙한 사람을 구별해내는 능력이다. 이 작품에 담긴 동물과 장애인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으로 미뤄볼 때, 작가는 나보다 진화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진화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얼마 전 만성적인 외로움이 암 발생률을 높인다는 무서운 뉴스를 봤다.)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비장애인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장애인이 경험하는 삶, 오직 인간의 필요로 인해 생겨나고 사라지는 동물과 로봇의 생애, 그리고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이건 나에게 꽤 울림이 있는 소재지만, 혹 은연중에 작가가 쏘아본 세계에 나도 동참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신이 서지 않는 나로서는 아직 감히 '공감한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보다 성숙한 사람이 나타낸 세계'라면 '내가 바라본 현실'보다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성숙하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말과 생각을 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럴 확률이 높다. 현실에 발붙인 내가 사는 세상보다 더 그럴싸한 작가의 이상향이 진정 내가 사는 현실로 번져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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