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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계에이방인 Oct 26. 2023

어떻게 해냈는가 보다 중요한것-트랜스 제주100k

2023 Trans JEJU 100K 후기 - 2



출발-CP1

한라산을 넘어가는 코스라 그런지 아니면 초반 병목 현상을 줄이기 위함인지 긴긴긴 오르막 코스다. 시작부터 주구장창 오르막이다. 옆에서 탄식이 쏟아진다. “언제까지 올라가야되.” 오르막이지만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길게 늘어져 병목현상을 피할수 있다. 호흡에 집중하며 호흡으로만 페이스를 조절한다. 이번에도 역시 시계,GPS는 없다. 내 속도, 심박수는 모른다. 장기적으로 봤을때 GPS시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만 가격의 부담에 구입할수가 없다. UTMB에 가기 위해선 꼭 필요하지만 국내에선 최대한 없이 할수있는 만큼 해볼수 밖에 없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오버페이스로 달리지도 않지만 걷지도 않는다. 천천히 호흡이 편하게 유지될만큼 달린다. 느리지만 조금씩 선수들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앞선다고 흥분해서도 뒤쳐진다고 실망해서도 안된다. 이것은 마라톤이 아니다. 100km에 걸친 모험이자 탐험이다. 상황은 언제 어디서든 급격히 바뀐다. 집중한다. 평정심을 유지한다.



시간은 보지 않는다. 그냥 다음 CP를 향해 달려간다. CP 2가 지나고 드디어 첫번째 산 영실코스를 오른다. 급격히 가팔라지기 시작하는 코스. 멈추면 안된다. 호흡에 집중하며 한발씩 차근차근 앞으로 내딛는다. 100km 장거리는 얼마니 빨리 달리는게 아니다(물론 그렇게 달리는 굇수들이 다수 존재한다). 흥분하지 않거 얼마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마지막까지 버티느냐의 싸움이다. 자기통제가 필요한 자신과의 싸움. 도로구간이 끝나고 트레일 구간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달라지는 시야. 급격하게 올라가는 경사도에 걷는거보다 더 느려지지만 자연은 그 괴로움을 차단하는 환각제다. 허벅지와 폐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뇌는 그것을 잊은듯 하다. 행복회로에 불이 들어온다. 서서히 나를 회복 시켜준다. 입가엔 땀과 침이 흐르고 있지만 미소가 머문다. 내가 자연을 사랑할수 밖에 없는 이유다. 언제나 다시 달리러 올수밖에 없다.


나에겐 트레일러너로써 치명적이 약점이 있다. 내리막을 못 달리는 것이다. 그건 치명적인 약점이다. 기록을 줄이기 위해선(제한시간이 있기에 시간을 줄일수 있는 방법들은 다 동원해야한다) 내리막을 뛸수 있어야 한다. 무엇때문인지 도무지 내리막을 달릴수가 없다. 첫째가 발목의 불안정성 때문인가 같다. 오르막 만큼이나 내리막을 슬금슬금 기어 내려간다. 여전히 이번에도 내리막은 실패다. 그래서 나는 멈춰 쉴 시간이 없다. 부지런히 달리고 걸으면서 쉬어야 한다. 영실코스는 무난하게 넘어왔다. CP3 에서 물을 보충하고 드랍백이 있는 CP4 로 향한다. CP4 까지는 무난하다. 다만 발가락이 아프다. 물집인지, 아니면 쓸려서 그런지 움직일때마다 따갑다. 드랍백은 필요한 물건(갈아입을 옷가지들, 개인식사, 보충식, 신발 등등)을 백에 넣어서 지정된 CP로 이동 시켜준다. 쉽게 말하면 셀프 서포트다. CP4 를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한라산을 오르게 된다. 그전에 재 정비하기에 안성맞춤 이었다. CP4 에 도착해 장비검사를 받고(필수장비가 없으면 패널티가 적용) 드랍백을 챙겼다. 간단한 죽이 제공 됐지만 식기를 꺼내기가 너무 귀찮다. 드랍백에 넣어둔 피로회복제를 마신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양말을 갈아 신었다. 더이상 발가락이 따갑지는 않다. 물을 보충하고 한라산으로 올라간다(관음사 코스).



그토록 오고싶었던 한라산. 트랜스 제주에 신청한 이유는 UTMB 스톤을 위함도 있었지만 나에겐 한라산의 지분이 더 컸다. 이렇게 해야 다시 올수있다는 사실이 한심한거 같기도 하지만 오른다는 현실이 도파민을 뿜어낸다. 날씨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거 같다. 확실히 산속은 날씨가 차갑다. 바람막이를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하며 체온 유지를 하며 신나게 한라산을 올랐다. 좋다. 즐겁다. 힘들지만 즐겁다. 고통스럽지만 좋다. 변태는 아닌데 그 미묘한 고통이 좋다. 비가 내린다. 역시나 비오는 산속은 다른 세계다. 산신령이 구름을 타고 내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점점 숲이 사라지고 하늘이 가까워진다. 나무가 낮아진다.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하늘로 오르는 느낌이다.


내려오는 등산객들만 보인다. 올라갈수록 비가 멎어진다. 다행이다. 사진을 찍을수 있을거 같다.  백록담을 다시 볼수있다는 생각에 들뜬다. 누군가와 함께 였다면 좋았을텐데. 이 기분을 혼자 느껴야 하는게 쓸쓸하기도 하면서 나만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해진다. 그래, 이건 나의 오리지널티다. 내가 직접 경험에서 오는 나만의 것이다.



7년만에 다시 오른 한라산. 그대로 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한라산이다. 7년전 오른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때의 나보다 더 성장해 있기를 믿어본다. 한라산 정산에서 7년전의 나를 하늘 위로 보낸다. 그리고 오늘의 나를 놓아두고 온다. 다음에 올때는 더 성장해서 올게. 다시보자.



비에 젖은 산길을 내려간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발한발 조심스럽다. 여전히 극복이 되지 않은 내리막. 이제 산을 오르는 구간은 끝이 났다. 피니시까지 고도는 계속해서 내려간다. 이제부터 시간을 줄여 나가야 하지만 도무지 달릴수가 없다. 길고 긴 성판악 코스를 내려온다. 성판악 CP에서 비에 젖은 짜파게티 한그릇.


어려운 구간은 끝났다. 더이상 급격히 고도가 오르는 코스는 없다. 약간의 업다운과 비. 그리고 피로와의 싸움만이 남았다. 한라산 오르고 난이후 급격하게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백록담에서부터 다운힐은 터덜터덜 걸을수 밖에 없었다. 지금부터는 어떻게든 끈질기게 버티면서 달려야 한다.


본격적으로 비가 얼굴을 때린다. 이제 비는 익숙하다. 비가 오는 날에도 충분히 달린 경험때문일 거다. 호흡에 집중하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점점 앞질러가는 선수들이 많아진다. 도무지 띠라갈 힘이 안난다.

비오는 숲은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 해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 앞은 깜깜하다. 이제 헤드 렌턴의 불빛에만 의존해서 앞을 나아간다. 곧고 높은 나무들. 그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 숲을 달리고 있는 사람. 낭만이 넘치는 장면. 그 장면 속은 어떨까. 길은 미끄럽고 앞은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내 앞뒤로 아무도 안 보인다. 간간히 앞질러가는 선수들이 보이지만 이내 사라진다. 고요. 걸음을 멈추면 풀잎을 때리는 빗소리만 들린다. 혼자 남겨진 시간. 공백의 시간이다. 자극에서 차단된다. 감가들은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 고요함 속에선 어쩔수없이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만하면 충분해, 피로하고 배도 고프고 쉬고 싶지 않니, 발도 아프고 온몸이 힘들 잖아, 봐봐 넌 지금 뛰지도 못하고 좀비 마냥 겨우 걸어가잖아, 포기해, 그럼 편안함이란 즉각적이 보상이 주어질거야, 고통에서 해방 시켜줄께.'




'고통의 너머엔  뭐가 있을지 궁금하지 않니?'

장거리 경주에선 평정심을 유지하는게 중요하다. 들어오는 자극들에 크게 반응을 하지 않는 것 이다. 견디다보면 언제그랬는거 처럼 획복이 될때가 있다. 물론 견뎌내야한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비를 맞고 이미 60km가까이 달려왔다. 산을 넘고 피로가 쌓일만큼 쌓였다. 도저히 움직여 지지 않는다. 헤드렌턴에서 나오는 불빛만큼만의 시야로 길을 걷는다. 터덜터덜. 기운이 없다. 역시 나는 역부족이구나. 끝까지 갈수는 있을까.

고통스럽다. 육체도 고통스럽지만 나의 한계, 무능력에 직면했을때의 심정은 상상을 넘어선다. 극복해야만 하는데 의지로는 되지 않는다. 깜깜한 어둠속. 도와줄곳은 어디에도 없다. 견딘다.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해서 견딘다. 호흡에 집중하고 한발작 내딛는 발에 집중한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며 견딘다. 능동적인 견딤이다. 이것이 인내다. 인내는 그냥 버티는것이 아니라 버티는 동안 무엇을 하느냐다(-Joyce Meyer). 그래서 평정심이 중요하다. 동요하지 않는 정신이 필요하다.

아무리 피로한 상태에서도 놀랍게 회복되는 순간들이 있다. 장거리 경주에서 한번씩 경험해보게 된다. 그 순간은 놀랍다.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진다. 도저히 움직여 지지 않던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진다. 달리는게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된다. 어둠을 헤치며 숲을 달려간다. 그 순간이 나에게도 허락이 됐다. 말없이 생각없이 공백의 시간을 유지하며 그저 몸을 움직인다.


마직막CP. 멈추지 않고 지나쳤다. 지금 이 flow를 끊고 싶지 않았다. 1시간 정도면 끝이다. 정말 끝이 나는거다. 도로가 보인다. 긴긴 내리막을 달려간다. 끝이라는 안도감, 해냈다는 성취감과 숲의 에너지를 받아 한껏 올라간 고양감에 취했다. 지금 이순간이 좋다. 이 느낌은 누구도 줄수없다. 스스로 쟁취해야만 가질수 있다.

순간 레이스 코스를 표시한 코스마킹이 보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몇미터 동안 코스마킹이 안 보인다는건  내가 알바를 했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길을 잃었다. 그러나 괜찮다. 목적지는 잃지 않았다. 멀리서 불빛이 보인다. 불빛이 인도 해주는 대로 달린다.피니시 라인이 보인다. 모험을 끝낼 시간이다. 천천히 천천히 거리가 줄어든다. 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작은 모험을 끝냈다.오늘도 나는 승리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지않았다. 내 발로 끝을 냈다.

 


피니시

나를 위한 화려한 조명도 시상식도 없다. 나를 위해 환호해줄 사람도 박수 갈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끝을 낼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마법이 풀리는거 마냥 순식간에 깊은 공허가 찾아온다. 허무함이나 허탈함이 아니다. 모든것을 쏟아부은 후에 찾아오는 공백의 시간이다. 일종의 야구에서 타자가 친 공이 담장을 넘어가 홈런이 될때까지의 시간. 그 공백의 시간이다. 천천히 그 시간을 즐긴다. 하나하나 곱씹으며 그 공백에 정성드려 채워 넣는다. 그것은 누구도 해줄수 없다. 나는 또하나의 나를 채웠다.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작품을 그렇게 계속해서 채워간다.


나의 삶은 나의 것으로 채워나간다.



#트랜스제주 #러닝 #트레일러닝 #퓨처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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