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서 Jan 04. 2024

새해를 맞는 마음

새해를 맞이하는 밤, 복통으로 잠에서 깨 홀로 침실 밖으로 나왔다. 잔병치레가 없는 편이지만 방심할 즈음 이렇게 연례행사처럼 소화불량이 찾아오곤 한다. 찬장에서 소화제를 꺼내 한 알 삼키고, 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릴 량으로 잠시 소파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35분. 온 가족 감기 기운에 새해맞이 카운트다운도 생략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터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혼자라도 해의 경계를 넘어보자는 마음으로 12시를 기다렸다.

     

“1월 1일이 되면 모두 다 똑같이 한 살씩 먹는다고? 그건 너무 이상해!” 대학생 때 한국식 나이 계산법에 놀라던 일본인 교환학생 친구가 했던 말이다. 새해를 며칠 앞둔 연말이었다. 맥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친구들과 나는 언제나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 또 나이만 한 살 늘어가는구나.” 이십 대의 우리에게 1월 1일은 나이의 변화를 인식하는 날과 같았다. 늘어난 숫자 1의 값은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1이 더해진 나이를 인지하는 순간 작은 추 하나가 몸 어딘가에 얹어진 듯 묵직하게 마음을 눌렀다. 미래에 한 발 가까워질수록 존재가 선명해져야 한다는 희미한 압박이 느껴졌다. 동시에 멀어지는 젊음에 대한 회한도 함께 얼굴을 내밀었다. 누군가는 어서 빨리 서른이 되어 안정을 찾고 싶다 했고, 누군가는 혼돈의 이 시절을 더 즐기고 싶다고 했다. 공존하는 엇갈린 마음들 속에서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하지 않았다.


나이 듦에 대한 부담감 없이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된 건 삼십 대에 접어들고부터였다. 정확히는 결혼과 출산을 겪고 난 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단순히 서른이 넘었기 때문에 찾아온 성숙함과는 달랐다. 사회가 암묵적으로 만들어 놓은 일종의 나이대별 프로세스에 안착했다는 안도감. 급한 과제를 완수하고 맞이한 휴식기처럼,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달력 한 장을 넘기는 것, 해가 바뀌어 새 날이 밝아오는 것에도 무감각해졌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의 경계선이 희미해질수록 새로운 다짐이나 목표 설정 같은 것들도 의미를 잃어갔다. 안정감은 간절함을 앗아갔고 그런 사실을 깨달을 즈음 정체 모를 공허함이 찾아왔다. 근심도 큰 걱정거리도 없었지만 밑 빠진 독처럼 자꾸 무언가가 새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좀 더 ‘나 자신’으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했던 건 그 무렵부터였다.

             

작년 새해는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출발한 첫 해이기도 했다. 읽고 사유하며 내 안을 탄탄히 다지겠다는 다짐과 글을 쓰며 나 자신을 찾아가겠다는 소망. 그런 나의 결심에 열정을 불어넣어준 책을 만난 것도 일 년 전 이 무렵이었는데, 바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이다. 주인공 스토너의 삶은 언뜻 쓸쓸하고 불행해 보이지만, 일생에 걸쳐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묵묵히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책을 읽은 후 희붐한 새벽빛처럼 마음에 온기가 내려앉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쩌면 나는 출산과 육아에서 겪는 현실적인 고충과 환경을 핑계 삼아, 제자리에 안주해 버리려는 스스로를 정당화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너는 그런 나를 일어서게 만들었고 잠잠히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다.

     

올해로 꽉 찬 마흔을 맞이한다. 수직선을 그어 인생의 구간을 나눈다면, 내겐 전후의 구분이 분명해질 큰 점 하나를 찍을 나이가 아닐까 싶다. 저마다 각자의 시침과 분침대로 제 속도에 맞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도, 시간의 마지노선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묵묵히 나의 열정을 좇을 것. 나 자신의 목소리에 더 자주 귀를 기울이리라 다짐한다.


작년에 기록해 둔 다이어리를 다시 펼쳤다. 으레 하던 것처럼 소소한 기록들로 지난해를 돌아보다가 귀퉁이에서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나의 몫은 무엇일까. 항상 생각할 것!” 펜을 더듬어 찾아, 올해의 다이어리에 그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내가 해야 할 몫,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 지켜야 할 몫에 대해 고민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겠노라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새해 카운트다운 대신 팡팡 터지는 폭죽 소음으로 1월 1일을 맞이했다. 다행히 체기는 금세 가라앉았고 적막한 거실 가장자리에서 홀로 새 날을 맞이했다. 지대가 낮은 곳에 위치한 집이라 소리로만 폭죽을 느끼는 사이, 맞은편 동의 젊은 커플 한 쌍이 문 앞에서 작은 불꽃을 터뜨리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Happy New Year! 덕분에 창가에 앉은 내게도 행복이 전달됐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겠지. 조금 늦은 새해 인사지만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따스함이 전해지기를, 새해 첫 소망으로 빌며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닮은 너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