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아침을 켜는 요즘이다. 언젠가 사은품으로 받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찬장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건 일주일 전쯤이었다. 기계에 관심이 없는 터라 평소 같았으면 시큰둥하게 돌아섰을 것이다. 그날은 지나칠 수 없었다. 유독 산란했던 마음 탓이었을까. 음악이 고파진 나는 서둘러 스피커를 꺼내 휴대폰에 연결했다. 콘텐츠 공유 채널을 열자 누군가 정성스레 편집해 놓은 플레이리스트들이 다양한 제목으로 시선을 끌었다. 손끝이 멈춘 곳은 ‘겨울을 담은, 재즈.’ 화면이 바뀌고, 네모난 프레임 안의 골목길에서 펄펄 눈송이가 날렸다. 적막한 회색 건물을 양쪽에 두고 골목 저 끝에 홀로 서 있는 검은 실루엣. 그 옆엔 한 사람만을 위한 태양처럼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따스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화면을 응시하며 잠시 재즈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나도 그 골목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겨울의 한복판, 눈길 위에.
살면서 가장 많은 눈을 본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다 보면 시골 큰집 뒷산에서 놀던 예닐곱 살의 어느 겨울날이 떠오른다. 주워온 비료 자루를 덥석 깔고 오빠와 함께 타던 눈썰매. 그건 내 생애 첫 썰매이자 아직까지도 가장 스릴 넘치고 재밌었던 겨울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작은 발이 눈 속으로 폭폭 빠질 때마다 발목 안쪽까지 전해지던 차가움. 코끝이 시린데도 아랑곳 않고 씩씩하게 언덕을 올랐더랬다. 눈송이를 동글동글 모아 꺅꺅 소리치며 던지다가, 철퍼덕 눈밭에 누워 함박 웃던 우리. 삼십 년도 더 지난 추억이지만 멀지 않은 시간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학창 시절, 그때의 소녀들은 왜 그리도 첫눈을 기다렸을까. 올해는 언제 첫눈이 온대? 진짜로 화이트 크리스마스래? 창밖에 먹구름만 살짝 덮여도 나는 친구들과 ‘눈 오면 좋겠다.’ 하며 두 손을 동그랗게 맞잡곤 했다. 눈 오는 날을 상상하는 것은 별가루가 내려앉는 스노볼을 바라보는 마음과 닮아 있었다. 반짝이는 작은 송이들로 온 마을이 하얗게 변할 수 있다니. 동화 같기만 한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사전을 찾지 않고도 ‘로맨틱’, ‘낭만’ 같은 단어들의 의미를 오롯이 익힐 수 있었다.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이 언제였냐 묻는 말에, ‘눈 오는 날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때’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한창 고단했던 이십 대 후반의 어느 날, 쌓인 눈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울적해지던 마음을 기억한다. 1호선 지하철이 늦게 오거나 버스가 언덕길을 오르지 못해 멀리 우회할 때, 밤새 쌓인 눈길 위를 휘청휘청 걸으며 출근길에 늦진 않을까 종종 댈 때. 언제부터인가 눈은 그저 성가신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그런 마음 안에서 낭만의 꽃은 져 버린 지 오래였다. 눈 내리는 풍경을 앞에 두고도 그저 지친 하루 끝 생기 없는 표정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좋아하던 것에 무던해지는 자신을 깨닫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삶이 낯설어지는 순간들은 그렇게 찾아온다. 내가 나인 것 같지 않을 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방향으로 달라져 있음을 느낄 때. 이를테면, ‘눈 예보’를 듣고 흰 눈밭보다 눈 밟은 신발이 남긴 지저분한 얼룩이 먼저 떠오를 때. 어린 시절처럼 눈 속을 달릴 천진함은 사라진 지 오래고, 낭만 타령만 하고 앉아 있기에는 현실적으로 거슬리는 것이 많았다. ‘나도 그래. 나이 들면 다 그래.’ 그런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무언가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절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왠지 씁쓸했다.
큰아이가 네 살 되던 해 겨울이었다. 일어나 커튼을 열자 밤새 내린 눈으로 온 동네가 하얗게 덮여있었다. “우와 눈이다!” 창문 앞에서 휘둥그레 감탄을 나누는 것도 잠시, 나가자는 아이의 말에 걱정이 밀려왔다. 바람이 거센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한 번 나가면 또 한참 놀이터에서 안 들어올 텐데. 귀찮기도 했다. 따뜻한 방 안의 온기를 포기할 만큼 열정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망설이다, 계속되는 아이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모자와 장갑을 꺼냈다. 일종의 의무감 같은 마음에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놀이터는 이미 눈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래놀이 세트를 눈 위에 탈탈 쏟은 후 장난감 삽으로 눈을 퍼 담는 아이들, 플라스틱 썰매를 끌고 빠르게 질주하다 넘어지는 초등학생들, 눈덩이를 굴리느라 콩벌레처럼 몸이 동그래진 어른들, 부지런한 이웃들이 솜씨 좋게 만들어놓은 눈사람까지.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던 내가 눈이라도 뭉쳐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아이는 말릴 새도 없이 철퍼덕 눈 위에 앉아버렸고, 찬 바닥에서 양팔을 휘휘 젓다 이내 뒤로 누워 떼구르 구르기 시작했다. “안 돼, 옷 다 젖어!” 내가 외치는데, 한참 전부터 근처에 서 계시던 할머니가 말을 건넸다. “애기 엄마도 같이 뒹굴어 봐요. 허리만 튼튼해도 난 벌써 드러누웠지.”
안 그래도 끌차에 의지해 홀로 계신 할머니가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길이 미끄러워 못 들어가고 서계신 건가, 어디가 불편하신가.’ 내 걱정과 달리, 할머니는 일부러 나온 거라고 하셨다. 보행보조기에 기대서라도 흰 눈을 밟고 싶어서, 춥고 미끄럽지만 이 앞에까지만, 조심하면 된다면서. 수줍은 듯 말씀을 이어가는 할머니의 얼굴이 소녀처럼 말갛게 빛났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할머니의 자줏빛 털모자 위로 진눈깨비가 내려앉았다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자의 앙고라 털이 가볍게 흔들렸다. 눈밭에서 피어난 꽃망울처럼. 돌아서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고요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끝내 아이처럼 눈밭을 뒹굴진 못했다. 허리도 아프지 않고 무릎도 튼튼한 나는 어디에 매여 그리도 꼿꼿이 한 걸음 물러서 있던 것일까. 어쩌면 내게서 설렘을 앗아간 건 나이가 아니라 내 마음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을 먼저 생각하는 태도.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사이, 나도 모르게 즐거움보다 귀찮음을, 감탄보다 한숨을 더 가까이 둔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눌러쓴 털모자 아래, 아이처럼 반짝이던 할머니의 눈빛, 설렘 가득한 그 얼굴을 나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좀체 눈이 내리지 않는 텍사스에서, 눈 덮인 고향의 풍경을 사진으로만 접하는 요즘이다. 눈 오는 날을 특히 좋아하는 큰아이와 오랜만에 에즈라 잭 키츠의 그림책 「눈 오는 날」을 꺼내 읽었다. 주인공 피터와 함께 상상 속에서 우리는 흰 눈을 밟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눈 비를 떨어뜨려도 보고, 철퍼덕 누워 스노엔젤도 만들었다. 피터가 주머니에 소중히 눈덩이를 담아 오는 장면에서, 작은아이가 끼어들어 속삭인다. “저러면 다 녹을 텐데. 그치만 나도 눈사람 만들면 집에 데려오고 싶어.” 그 말에 다시금 피어오르는 설렘. 아이들과 함께 눈밭을 뛰노는 상상을 하며, 다음 겨울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