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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동반자가 된 조지아 딸내미 ‘안나’

여행 길동무에서 동반자로

by 야간비행

2024년 1월, 베트남 냐짱에서 만나 3일간 여행을 함께했던 25세의 조지아 딸내미 안나. 1년 후 부다페스트에서 다시 만나 길동무가 되었고, 마침내 2025년 9월 나의 트빌리시 한 달 살이 기간 동안은 길동무 이상으로 정서적인 유대감이 깊어졌다. 안나는 나를 데두슈카(할아버지), 나는 안나를 도치카(딸내미)라고 부른다. 국경과 세대를 넘어선 우리 둘만의 호칭이다.


한국 할아버지, 안나의 든든한 지원군

한번은 안나가 엄마와 화상 통화를 하던 중 나를 바꿔주었다. 엄마에게 내 얘기를 많이 했는지, 안나를 잘 챙겨주고 이뻐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이제 나는 안나의 부모님들까지 인정하는 안나의 한국 할아버지가 되었다.


안나는 강한 햇빛과 고된 삶의 흔적으로 주름살이 가득한 조지아 남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이 내 나이 또래일 거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조지아 남자들은 68세쯤이면 정말 '할아버지'처럼 늙어 보인다. 그러니 68세인 나를 보고 안나가 데두슈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나는 여행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돈이 모이면 바로 배낭을 싸서 여행을 떠나는 아이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동남아를 혼자 여행 중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이라서 전 세계를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나를 무척 부러워 한다. 안나는 향후 몇 년간의 나의 여행계획을 듣더니 내년 초 카이로 한 달 살이 할 때 함께 가고 싶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여행 동행자, 길동무 수준이었는데 이제는 함께 여행을 계획하고 상호 의존하고 지지하는 여행 동반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안나가 젊은 남자 대신 나를 선택한 이유

나로서야 안나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젊고 매력적인 안나가 젊고 멋진 남자들과 여행을 하지 않고 왜 나와 함께 하려 할까? 안나가 나를 선택한 것은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조지아에는 여행에 진심이거나 값비싼 여행경비를 감당할 수 있는 친구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혼자 다녔단다. 둘째, 혼자 여행하면서 여행지에서 만난 젊은 남성들과 동행을 해본 적도 있지만, 여행 스타일이 달라서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안나는 에너지가 넘치고 흥이 넘치는 아이다. 함께 산을 걸어보면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걸음이 무척 빠르고 지치지 않는다. 인적 드문 평지에서는 깡충깡충 뛰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내 손을 붙들고 크게 흔들며 행진하듯이 걷기도 한다. 옷입은채로 바다로 뛰어들기도 하고 열매를 따려고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한다. 보통의 25세 여자애들과는 매우 다른, 활달하고 개구쟁이 같은 아이다.


이런 에너지 넘치는 안나를 맞춰주는 남자가 없었던 모양이다. 안나가 나와 여행 중 "할아버지는 젊은애들보다 걸음이 빨라서 좋아요"라고 말할 때 그 의문이 풀렸다. 함께 다녔던 남자들 모두 안나보다 걸음이 늦어 답답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와 무관하게 안나와 나는 여행 스타일이 가장 비슷했다.


나 홀로 여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외로움을 극복해야 하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하다. 안나와 나는 나 홀로 여행을 즐긴다는 점이 동일한다. 또한 안나는 관광지 이곳저곳을 구석구석 찾아 걸어 다니는 스타일이며, 코카서스 험준한 산을 며칠씩 비박하며 등산했던 아이라서 아무리 많이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 나 역시 걷는 게 일상화되어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무척 빠르게 걷는 편이다. 우리는 걷는 속도와 여행 방식이 완벽하게 일치했다.


브런치 글, 신뢰를 증명하다

안나가 나의 카이로 한 달 살이에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미 숙소 예약이 끝난 상태였다. 방 하나짜리였는데, 안나와 함께 가기 위해 방 두 개짜리로 바꾸겠다고 했더니 안나가 나를 말린다. "방 두 개는 비싸니 싱글침대 두 개 있는 방이면 충분해요!" 호스텔 생활에 익숙한 안나는 한방에서 지내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나로서는 그럴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방 두 개에 주방까지 갖춘 숙소를 예약했고, 사진을 본 안나는 넓은 주방이 좋다며 자기가 아침 식사를 맡겠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 요리를 배워 나에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점심과 저녁을 사주기로 했다. 나는 15년 전 카이로 여행을 했으니, 이번에는 안나가 가고 싶은 곳을 중심으로 여행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안나가 나와의 카이로 여행계획을 남사친들에게 얘기하자, 그들이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인해야겠다며 안나와 함께 나를 보자고 했다. 그들은 나의 인스타나 페이스북 계정을 물으며 나를 '조사'해 보겠다는 의미를 내비쳤다. 나는 대신 브런치스토리 웹사이트 주소를 보내주었다.


셋은 브런치 사이트를 번역해, 몇 년간 세계를 누비며 쓴 나의 글 목차를 훑어본 후 놀라워하는 표정이다. 나에 대한 믿음이 생겼는지 남사친들도 나를 '할아버지'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안나에게는 그녀에 대해 쓴 글 몇 개를 보여주었다. 안나가 러시아어로 번역 후 읽어보더니 아주 즐거워한다. 자기를 주제로 쓴 글들을 한국 사람 몇 명이나 읽었는지 아주 흥미로워하며, 브런치 글에 삽입된 자신의 사진을 보면서 기뻐한다. 브런치 글을 읽은 후 안나는 나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졌고, 남사친들도 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브런치 글이 나에 대한 신뢰를 증명해 준 셈이다.


정서적 유대감, 따뜻한 작별

카이로 여행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 이후 안나와의 사이는 더욱 깊어졌다. 안나는 나를 정말 할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할머니의 병환에 대해 걱정을 토로하고 애인과의 갈등을 얘기하면서 나의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패션관련 일을 해서인지 평소에는과감한 옷을 입고 다니지만 나를 만날 때는 얌전한 옷을 입고 나온다. 처음 안나를 만났을 때 노출이 심한 옷이어서 놀랐다고 쓴 내 브런치글을 읽은 후 안나는 나를 놀라게 하지 않도록 교복같은 옷을 입고 나온다. 이것 역시 나를 할아버지로 여기고 있어서 일 것이다.


나 역시 안나가 딸과 손녀의 중간 정도 되는 듯 느껴졌다. 딸과 손녀는 무슨 짓을 하든 예뻐 보이고, 애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준다. 어느덧 안나가 하는 짓 모두가 예뻐 보이고, 안나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매일 카페에서 카공(카페에서 공부)을 했고 안나는 퇴근하면 나에게 달려왔다. 안나가 오면 함께 구시가지를 걷다가 저녁을 먹고 이후에 공원과 강가를 걸었다. 안나는 걸을 때 내 팔을 잡거나 팔짱을 낀다. 저녁마다 잔잔한 즐거움이 밀려왔다. 안나가 쉬는 주말이면 함께 교외의 관광지를 가거나 하이킹을 했다. 트빌리시외곽의 호수에 소풍을 다녀오고 트빌리시 근교에 있는 고성과 역사도시인 시그나기 등을 함께 다녀왔다.


안나는 내가 트빌리시에 있는 동안에는 그녀의 모든 여유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려 했다. 여행동반자인 할아버지를 챙기려는 착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나의 몸에 밴 여성에 대한 배려가 그녀에게는 특별한 행복감을 안겨주는 모양이었다. 감기기운으로 힘들어하는 안나를 위해 내가 들고 온 감기약을 건네고 택시를 불러서 집에 타고 가도록 했더니 깜짝 놀라며 감격해한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배려가 이곳에서는 무척 생경한 모습인 듯했다.


귀국 전날, 안나는 나를 위해 시외곽 산에서 환송을 위한 특별한 바비큐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무거운 배낭 안에 돼지고기와 채소, 꼬치까지 모든 것을 담아 왔다. 놀랍게도 그녀는 바비큐 통 대신 산 이곳저곳을 뒤져서 가져온 돌로 원시적인 화덕을 만들고 주어온 나뭇가지로 불을 붙였다. 오지 생환 훈련을 하듯 고군분투하며 바비큐를 만들어 내게 건네주는 안나의 모습은 정말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도와주려 해도 모든 것을 스스로 다 하는 모습에서 깊은 정을 느꼈다.


귀국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 안나가 왔다. 나를 꼭 껴안으면서 몹시 아쉬워한다. 할아버지가 가버리면 너무 외로울 것 같다면서 눈물을 글썽인다. 나도 안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우리는 3개월 후 다시 카이로에서 만나 함께 지낼 것이다. 그때가 기다려진다.

20250924_155812.jpg 산에 있는 벽돌을 주어와서 꼬치길이에 맞춰 화덕을 만든다 : 장갑도 없이 저 무거운 돌들을 낑낑대며 옮기는 강철 소녀이다.
20250924_161953.jpg 나뭇가지들로 불을 피운다 : 산에서 불피우는게 불법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여름에는 괜찮다고 한다.
20250924_163222.jpg 굵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 주어 온 나무판때기로 열심히 부채질을 한다.
20250924_170911.jpg 바비큐 고기를 불에 굽고 야채를 준비한다.
20250924_171255.jpg 잘 읽은 바비큐들
20250922_143921.jpg 안나가 퇴근하면 맛집을 찾아 식사
20250922_135149.jpg 트빌리시 두 시간 거리의 역사도시 시그나기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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