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청룡, 죽어도 트윈스

승리의 기쁨보다 패배의 아픔을 곱씹어야 했던 40년 열혈 팬 이야기

by 윤진

'검은 고양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영국의 프로축구 클럽. 1879년에 창단되어 1부 리그인 프리미어리그 우승만 6번을 차지한 유서 깊은 명문구단. 하지만 마지막 우승이 머나먼 과거인 1936년이고, 지금은 충격적인 백투백 강등 끝에 3부 리그인 리그 원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팀. 바로 선덜랜드 AFC 이야기다.


내가 선덜랜드 AFC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죽어도 선덜랜드>(Sunderland 'til I die)를 보게 되면서부터다. 2017-18 시즌에 2부 리그인 챔피언쉽으로 떨어진 후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하는 감동적인 과정을 보여주고자 제작되었으나 오히려 2년 연속 3부 리그로 강등당하는 처참한 모습을 담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덜랜드 AFC를 뼛속 깊이 사랑하면서 때로는 분노의 욕설을 퍼붓기도 하는 지역 팬들의 격정적인 응원이었다.


선덜랜드만큼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채,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10년 이상 암흑기를 보낸 한국의 프로야구팀이 있다. 1994년 우승 이후 30여 년 동안 중하위권을 맴돌았고, 2018 시즌에는 같은 연고지역의 라이벌 팀에게 1승 15패라는 기록적인 참패를 당한 엘지 트윈스가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적인 출범일에 우연히 맞닥트린 운명 같은 만남 이후 지금까지 4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승리를 기원하고 있으니. 이제부터 전해드릴 내용은 어쩌다 만나게 되어 죽어도 변치 않는 열혈 엘지 트윈스 팬이 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나의 야구사랑 스토리다.




때는 바야흐로 1981년 8월, 봉황대기 고교야구 결승전이 벌어진 날. 막강 전력의 선린상고와 경북고가 청룡기에 이어 다시 한번 결승에서 맞붙었다. 당시 고등학교 야구경기는 볼거리가 별로 없는 국민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스포츠였고, 당연히 TV로 생중계되었다. 초미의 관심이 쏠린 이 경기에서 선린상고의 투타 에이스 박노준이 1회 홈 슬라이딩하다가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결국 선린상고는 4:6으로 통한의 역전패를 당한다.


지금도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잊을 수 없다. 밤 9시 정규 뉴스가 시작되었는데 첫 꼭지가 박노준 선수의 상태를 확인하는 소식이었다. 응급수술을 받고 입원한 병실에서 기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현장 리포트를 전했다. 선린상고를 뜨겁게 응원했던 중학생 까까머리 나는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의 쾌유를 빌었다. 내가 생생하게 목격한 그때의 감동과 충격은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짜릿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2년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시작된 프로야구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회유하기 위해 추진한 이른바 3S 정책의 하나일 뿐이라고 거센 비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교 야구의 매력에 푹 빠진 채, 진정한 프로페셔널 야구를 즐길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나는 그저 순진무구한 10대 야구팬일 따름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청한 프로야구 개막전.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는 치열한 연장 승부를 펼쳤고, 결국 이종도가 끝내기 만루홈런을 친 MBC 청룡이 간신히 이겼다. 극적인 승리 후 그라운드 인터뷰에서 MBC 청룡의 감독 겸 4번 타자로 활약한 백인천이 눈물을 글썽이며 고국에 돌아와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 기쁘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어느 팀을 응원할지 조금은 막연한 마음으로 본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어쩌다 보게 된 백인천의 인터뷰는 마치 운명처럼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1990년 MBC 청룡은 엘지 트윈스로 새롭게 창단했다. 럭키금성을 LG로 바꾸고 여의도에 쌍둥이 빌딩을 본사로 마련한 엘지가 그룹 홍보 차원에서 프로야구단을 전격 인수한 것이다. 청룡에서 트윈스로 바뀌면서 프로야구판에 거센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1990년과 1994년 시즌에 연거푸 우승을 차지했고, 투수진의 과학적인 역할분담을 토대로 신바람 야구가 흥행을 몰고 왔다. 특히 1994년에 입단한 신인 3인방은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실력으로 여성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990년에 이어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환호하는 엘지 트윈스 선수들


그러나 어찌 알았을까. 그 이후의 끝 모를 부진과 암흑과도 같은 침체의 늪을. 해태와 기아로 이어지는 전통의 타이거즈,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왕조시대를 풍미한 SK 와이번즈와 삼성 라이온즈 그리고 옆집 두산 베어스가 번갈아가면서 우승하는 모습을 그저 허탈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남들이 승리의 세리머니를 나눌 때, 우리는 형편없는 경기력에 실망해야 했고 시합 후 서둘러 빠져나가는 감독을 붙들고 노상 청문회를 개최하곤 했다.


그래도 찐 팬인 나에게는 잊지 못할 시즌이 몇 번 있었다. 구원왕 이상훈-신인왕 이병규, 두 터프가이의 활약이 빛났던 1997 시즌, 마법의 용병술을 보여준 김성근 감독과 신인 이동현의 눈물겨운 역투가 인상 깊었던 2002 시즌, 패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으로 2위를 차지하고 10년 만에 포스트시즌을 치른 2013 시즌이 대표적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MBC 청룡에서 엘지 트윈스로 이어진 기나긴 역사의 발자취는 4915경기 2347승 2457패 111무 승률 0.489라는 통계로 요약된다. 비록 승리의 감격보다 패배의 쓰라림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나는 트윈스의 팬이어서 행복하다. 승패에 목숨 거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나는 좋아하는 엘지 선수들의 성장과 활약을 보며 고단한 일상을 위로받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은 예술작품 감상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야구야말로 아는 사람에게는 손에 땀이 날만큼 긴장되고 흥미로운 스포츠이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운동 경기일 것이다. 2002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와 월드시리즈의 중계 프로그램을 비교 분석한 <스포츠 방송의 영상미학과 입체적 구성 방식>이라는 학술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나는 야구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야구의 특성이자 매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야구는 풍부한 여백을 지닌 두뇌스포츠다. 투수가 세트포지션에서 공을 던지려고 준비하는 순간에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준비하고 계산한다. 단순하게 보이는 주자 견제에도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둘째, 투수 놀음이라 불릴 정도로 투수의 비중이 높다. 이 말은 선발투수 매치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약팀이 강팀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스포츠라는 것이다.


셋째, 공격과 수비가 공평하게 배분되고 시간제한이 없다. 축구처럼 약팀이 일방적으로 몰리면서 수비만 치중하는 불상사가 없다. 언제든지 위기를 잘 넘기면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이제 4월이 되면 대망의 2021 시즌 프로야구가 개막한다. 이번 주말부터 10개 구단은 시범경기를 통해 그동안 준비한 실력을 점검하는 기회를 갖는다. 지난 2020 시즌은 엘지 트윈스에게 너무나 아쉬웠다. 마지막 3경기에서 1승만 거두었더라도 정규리그 2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NC 다이노스와 멋진 진검승부를 벌일 수 있었다.


더 이상 "만약에"를 되뇌며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경우의 수를 따지며 마지막까지 순위 싸움을 할 필요가 없도록, 이번 시즌에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치고 나가기를 기대한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팬들이 감동할 만큼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주느냐 일 것이다. 그렇게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다 보면 성적은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어쩌다 보니 MBC 청룡을 응원하게 되었고, 그 이후 40년 동안 죽어도 변치 않는 존재가 된 엘지 트윈스가 2021년에 화려하게 비상하여 마침내 우승하는 순간까지 나의 뜨거운 응원은 계속될 것이다.


프로야구 10개 팀을 응원하는 전국의 프로야구팬 여러분, 모두 모두 파이팅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