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오스의 가면(1939) 에릭 앰블러
[세계 추리문학전집] 36/50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소설 속 그리스인은 조르바다. 평생 자유를 추구하며 산 노인 조르바. 디미트리오스는 조르바와 정반대 위치에서 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그리스인이다. 다만 자유와 의로움이 아닌 욕망만을 일생 철저히 좇았다. 무화과 포장 인부로 일하다 저지른 살인을 시작으로 펼쳐진 그의 범죄 역정은 실로 화려하다. 불가리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프랑스까지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터키 해협에서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된다. 영국인 추리 소설가 레티머는 우연히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시체를 참관한다.
희대의 범죄자에게 묘한 관심이 생긴 레티머는 오직 호기심 때문에 디미트리오스의 발자취를 뒤쫓는다. 하지만 어둠에는 어둠이 모인다. 불가리아 소피아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만난 남자 피터스는 레티머가 밝히지 않았는데도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레티머에게 접근한 피터스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 순진한 지식인 소설가가 디미트리오스를 파고드는 이유, 즉 단순한 호기심과는 상충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느덧 레티머는 음모에 휘말린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악인이지만 모호함과 이율배반이 특징인 피터스는 은밀하게 레티머를 가면 속 실체로 이끈다.
무고한 남자가 곤란을 겪는다. 이는 더없이 히치콕 적인 테마다. 실제 동시대 활약했던 히치콕은 에릭 엠블러를 극찬했다. 한 작품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두 거장이 그린 쉽사리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악인들은 불길한 기운을 자아낸다. 설정과 묘사가 정교하며 빈틈이 없다는 것도 두 작가를 묶어주는 요소 중 하나다. 1930년대 소설이지만 동시대 관점에서 볼 때도 세련됨이 돋보인다. 이 때문에 에릭 앰블러는 스파이 소설의 최초이자 최고 거장이라 극찬받았다.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은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장르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는다.
남유럽과 동유럽이 주 무대다. 영국, 독일, 소련에서 펼쳐지는 스파이 소설에 익숙한 독자는 신선한 낯섦을 느낄 수 있다. 참담한 희생자들을 남긴 터키-그리스 전쟁과 긴박했던 불가리아 총리 스탐볼리스키 암살 미수사건 등 역사의 격동을 담담하고 사실적인 필치로 전하는 것도 특징이다. 장르 소설의 재미와 함께 시대적이고 지역적인 지적 만족을 확장할 수 있는 격조 있는 클래식이다. 물론 가장 인상적인 건 디미트리오스의 존재감이다. 이런 악행 전문가의 최후가 겨우(?) 갑작스러운 죽음일까.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