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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Feb 25. 2021

<라스트 레터> - '그 시절 첫사랑의 안부를 묻다'

[영화 후기,리뷰/일본 영화, 신작, 개봉작, 상영작 추천/결말 해석]

                                                                              

라스트 레터 (ラストレター, Last Letter)

개봉일 : 2021.02.24 (한국 기준)

감독 : 이와이 슌지

출연 : 마츠 다카코, 히로세 스즈, 안노 히데아키, 카미키 류노스케, 모리 나나, 코무로 히토시


그 시절 첫사랑의 안부를 묻다


반짝이던 학창 시절 또는 풋풋하고 싱그러웠던 첫사랑의 설렘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함께 계단을 걸었던 소년, 소녀는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2021년이라는 물리적 시간 속에서 당신은 잘 지내고 있나요?’ 문득 궁금해지는 날, 이 영화를 추천한다.



눈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영화 <러브레터>와 <하나와 앨리스>, <쏘아 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의 감독으로 유명한 ‘이와이 슌지’감독의 최근작 <라스트 레터>는 잊지 못할 첫사랑과 반짝이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여전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러브레터>에 비해 조금 아쉽긴 했지만, <라스트 레터>만 따로 놓고 본다면 이와이 슌지 감독만의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의미가 있는 영화였다. 영화 자체가 크게 모났던 건 아니지만, <러브레터>에 비해 아쉬운 느낌이 들었던 건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계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러브레터>는 겨울 오타루 설원이 배경이었지만, <라스트 레터>는 여름의 가고시마, 도쿄 등을 배경으로 진행되기에 겨울이라는 계절의 감성과 딱 맞긴 어려웠던 것 같다. 여름이 돌아올 때쯤 다시 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교복을 입고 교과서를 들여다보던 소년 소녀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된다. 설렘을 느끼던 시절을 되새기며 힘든 하루를 버티기도 하고, 너무 힘들어 그것을 잊기도 하고, 다시 돌아올 사랑을 기다리거나 그것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젠 전송 버튼 한 번이면 ‘오늘 뭐해?’와 같은 시답잖은 연락을 한통 남길 수 있는 시대지만, 만년필 또는 연필로 꾹꾹 러브레터를 눌러쓰던 그때의 설렘과 사랑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는 그때의 소년, 소녀는 긴 시간을 넘어 다시 편지를 쓴다. 적당히 느리게, 적당한 사랑을 담아서.


<라스트 레터>를 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편지지 한 장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라스트 레터 시놉시스


닿을 수 없는 편지로 그 시절, 전하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과 마주한 이들의 결코- 잊지 못할 한 통의 러브레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여름이 무르익는 7월 말, 마흔 살이 조금 넘은 나이의 미사키가 자살을 선택한다. 미사키의 동생 유리와 딸 소요카, 미사키의 딸 아유미 등 여러 친족들이 미사키의 마지막 걸음을 함께한다. 아픈 마음처럼 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유리는 아유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소요카를 엄마의 시골집에 맡겨두고 집으로 돌아온다. 언니 미사키에게 도착한 동창회 초대장을 들고 돌아온 그녀는 언니의 부고를 전하기 위해 동창회에 가기로 결심한다. 미사키와 닮은 유리는 동창회장에 입장하자마자 주목을 받는다.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미사키와 닮은 유리를 미사키라고 착각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리는 얼떨결에 언니의 이름표를 단채 무대에 오르고, 자신과 언니의 첫사랑 소지로와 번호를 교환하게 된다.



소지로는 동창회에 참석한 사람이 미사키가 아닌 유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잠잠히 유리가 보낸 편지들을 읽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미사키의 옛 주소를 찾아 편지를 보낸다. 소지로의 편지는 아유미와 소요카에게 전달된다. 미사키의 딸 아유미, 유리의 딸 소요카는 엄마를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딸들이다. 소요카는 미사키의 영정사진 앞에 앉아있는 아유미를 보고 “환생했다 해도 믿을 만큼 닮았어”라며 신기해한다. 사실 소요카도 만만치 않게 엄마 유리의 어린 시절과 붕어빵이다. 아유미와 소요카가 함께 있을때면 그 시절 미시카와 유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실제로 같은 배우가 연기를 하기도 했고, 설정 자체가 두 딸이 엄마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은 것으로 되어있다.)



함께 즐거운 여름방학을 보낼 생각에 들떠있던 어린 소녀들에게 편지가 도착하던 날, 아유미와 소요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미사키의 이름을 빌려 답장을 적는다. 소지로는 미사키에 대해 묻는 아이들의 편지에 어제 일처럼 기억나는 추억들을 적어 다시 답장을 보낸다. 엄마의 찬란했던 첫사랑 이야기는 소지로의 편지를 통해 엄마와 쏙 빼닮은 딸 아유미에게 전달된다.



미사키와 유리, 소지로의 인연은 소지로가 고등학교 3학년 6월쯤 전학을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유리와 함께 생물부 활동을 하던 소지로는 학교의 유명 인사인 전교회장 미사키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된다. 난데없는 여름 감기가 유행이었던지라 미사키의 마스크를 쓴 모습만 볼 수 있었던 소지로는 유리의 도움으로 미사키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게 된다. ‘우리 학년의 마돈나’라고 불리던 소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소지로는 금세 첫사랑에 빠진다.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는 첫사랑. 모든 우주의 중심이 너로 변하는 순간. 소지로는 첫사랑의 감정을 편지에 적어 유리에게 전달을 부탁한다. 소지로를 좋아하고 있던 유리는 어린 마음에 소지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유리의 거짓말을 알게 된 소지로는 유리에게 이유를 묻는다. 유리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자신의 러브레터를 건넨다. 하지만 결과는 뻔하게도 거절이었다. 미사키가 세상을 떠난 후, 유리가 언니의 이름을 빌려 소지로에게 편지를 했던 건 그 시절 멋진 선배였던 소지로에게 제대로 된 편지를 보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곳으로 편지를 보내면 당신에게 닿을까요.


소지로는 미사키에게 첫눈에 반해 러브레터를 쓰던 날부터 미사키와 헤어져 책을 집필하던 시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랑을 담은 편지를 쓴다. 사랑의 감정을 가득 담아 써낸 글들은 어느덧 ‘미사키’라는 제목을 가진 소설이 되었고, 소지로는 미사키가 했던 말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하지만 미사키는 소지로와 헤어진 직후 도망치듯 결혼을 했고, 소지로가 할 수 있었던 건 소설을 집필하며 완성된 글을 편지로 보내주는 것 뿐이었다. 아직도 사랑하지만 손을 뻗을 수 없는 여인에게 보낼 수 있는 건 가벼운 무게의 편지지에 적은 사랑과 진심뿐이으니까.


                                                                        

아직 너를 사랑한다 말하면 믿을 수 있을까?


소지로는 지금도 미사키를 사랑한다. 그는 19살 소년의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른이다. 미사키의 독서 취향을 따라 같은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한 소년은 “넌 소설가가 될 수 있겠어. 분명히”라고 말했던 소녀의 말대로 소설가가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당연히 사랑하는 소녀 미사키였다. 소지로는 미사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출간한 후, 오랜 시간 새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미사키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미사키 외엔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첫 소설의 재탕, 첫사랑의 재탕을 반복하며 아름답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지로는 여전히 미사키와 사랑했던 시간 속에 남겨진 소년이다.


미사키가 살던 곳을 방문하며 추억을 되짚던 소지로는 한여름의 환영처럼 지나가는 요시코와 아유미를 보게 된다. 아이들의 맑은 웃음에 튕겨진 밝은 햇살이 부드럽게 퍼지고 있다. 마치 그 시절 미사키와 유키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듯한 느낌이다. 아유미는 소지로를 알아보고 엄마에게 인사를 해주면 좋겠다며 소지로를 집으로 초대한다.



영정 사진 속 미사키의 모습은 소지로가 사랑했던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딱 연인으로서 함께 사랑을 나누던 대학생 시절 그때 그 모습이다. 동창회에 온 친구들과 유리, 소지로는 모두 나이가 들어 완연한 중년의 모습에 가까워져있었지만, 미사키의 모습은 20년 전 그때에 멈춰있다. 미사키는 한 소년의 사랑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소녀다. (영화 자체에서도 미사키의 어른이 된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미사키의 영정이 있는 방에선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고등학교 시절에 멈춘 소년을 앞에 두고도 시계는 멈추지 않고 초침을 돌린다. 무겁게 내려앉는 초침 소리는 마치 ‘시간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는듯하다. 물리적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그 시절 첫사랑을 중심으로 돌고 있던 소년은 사랑했던 소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마지막 편지를 전하며 현재의 시간을 받아들인다.


                                                                       

살아가는 일이 고통이 될 때, 분명 우리는 몇 번이고 이 장소를 떠올릴 것입니다.


아유미는 소지로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상자 하나를 꺼내놓는다. 미사키가 힘들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다는 소지로의 편지가 담긴, 미사키의 보물 상자다. 소지로는 연락이 되지 않는 미사키에게 꾸준히 편지를 보냈지만 그녀가 편지를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딸을 통해 듣게 된 한마디에 감정이 북받쳐 오름을 느낀다.


폭력적인 남편에게 휘둘리며 살던 시절, 미사키는 힘들 때마다 사랑이 묻어나는 소지로의 글을 보며 버텨낸다. 아유미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며 편지의 주인공이 언젠간 엄마를 데리러 와주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갖고 엄마의 곁을 지킨다. 미사키는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엄마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결국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아유미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될 때까지, 꽤나 긴 시간 살아가는 고통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소지로의 편지였다. 진심이 담긴 소년의 마음과 찬란했던 고교생 시절의 추억들은 미사키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힘이었던 것이다.


                                                                        

무한한 선택지와 가능성을 갖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미사키의 졸업 연설문 중 한 구절이다. <라스트 레터>의 주인공들은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지나간 시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소지로는 첫사랑 미사키를 잊지 못해 같은 소설을 반복하고 있고, 미사키 또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소지로의 편지를 손때가 탈만큼 읽는다. 유리는 학창 시절의 히로인이었던 멋진 선배를 잊지못해 미사키의 이름을 빌려 편지를 쓴다. 이들에게 편지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매개체다.


미사키, 유리, 소지로와 다른 세대인 유리의 시어머니에게 편지는 또 다른 의미다. 유리는 시어머니가 적은 편지를 당연하게도 러브 레터라고 생각하지만 편지에 적힌 건 빼곡한 영작이었다. 동창회에서 옛 스승을 찾아뵙게 된 시어머니는 스승을 통해 다시 영어를 배우며 새로운 배움으로의 걸음을 내딛는다. 그와 반대로 유리와 소지로는 동창회에서 마주친 후로 쭉- 지나간 첫사랑의 추억을 따라 걷게 된다.



천천히 걸어 도착한 추억의 끝엔 이제 고교생인 우리를 놓아주어야 할 졸업식이 기다리고 있다. 미사키의 졸업식 연설문엔 ‘힘들 때면 빛나는 고교시절을 추억하며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소지로는 미사키와 졸업식 연설을 연습하던 날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며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한다. 미사키가 아유미에게 남긴 유서 또한 그 연설문이었다. 미사키는 자신의 딸에게 ‘앞으로 나아가며 살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다음날 유리가 일하고 있는 도서관에 간 소지로는 유리에게 학교와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선물한다. 소지로와 유리의 추억 속에 등장하는 시끌벅적한 학교와 고교시절 미사키와 유리는 이제 추억 속에만, 사진 속에만 존재할 수 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소지로는 미사키가 좋아했던 작가의 작품집이 아닌 다른 작가의 작품집을 훑으며 “이제 소설과 진짜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말한다. 과거의 시간과 첫사랑의 기억에서 돌고 도는 소설이 아닌, 새로운 소설을 써 내려갈 준비가 된 것이다. 어쩌면 그 소설의 주인공은 또다시 ‘미사키’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지로가 써 내려갈 소설 속에서 그녀는 또 다른 삶을 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기다렸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여인이 되거나, 첫사랑과 결혼하게 된 신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지로가 어떤 소설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설의 주인공은 분명하게 행복했으면 한다.



누군가가 그 사람을 계속 그리워하면 죽은 뒤에도 사는 게 되지 않을까요?


오래된 학교는 철거가 결정되었지만 소지로가 남긴 사진과 그 시절 소년 소녀들을 통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미사키는 소지로의 소설 속 사랑하는 연인으로, 소지로의 러브레터 속 첫사랑 소녀로 오래도록 남을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글로 쓰고, 전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를 가장 오래, 진하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마음을 전하지 못해 망설이고 있다면 한 장의 편지를 통해 잊지 못할 사랑의 흔적을 남겨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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