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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Aug 20. 2021

<김씨 표류기> - '고립된 세상에서 희망 찾기'

[영화 후기,리뷰/왓챠, 한국 영화 추천/결말 해석]

                   

김씨 표류기 (Castaway On The Moon, 2009)

개봉일 : 2009.05.14

감독 : 이해준

출연 : 정재영, 정려원, 박영서, 구교환


고립된 세상에서 희망 찾기


세상을 살아가는 건 만만치 않다. 어른은 사회에서 어른 1인분의 양을 해내야 한다. 눈에 띄지 않는 격식 있거나 평범한 옷을 차려입고, 순식간에 불어나는 여러 빚들을 모르는체하며 바쁜 발걸음의 사람들 사이에 섞일 것. 이게 바로 어른의 일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인생은 외롭고, 벅차고, 두려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왜 이리 작고 하찮은 건지, 아무리 열심히 팔을 휘저어봐도 하루하루 더 깊은 물속으로 잠길 뿐이다. 차라리 고립되거나 사라져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며 얼마 남지 않은 용기마저 쥐어짜기 힘들 때가 있다.


<김씨 표류기>는 이런 어른의 삶을 살다가 지친 나머지 끝내 자살을 선택한 주인공이 운수 좋게도 살아남아 도심 속 무인도(밤섬)에 고립되어 표류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포스터와 분위기가 다른 영화’, ‘포스터 때문에(?) 관심을 받지 못한 영화.’라는 주제로 이야기할 때 <지구를 지켜라>와 함께 항상 언급되는, 한국판 <캐스트 어웨이>라는 이 영화. 이러한 소문을 듣기 전인 학생 시절, 포스터 때문에 코미디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내용과 분위기가 퍽 달라 살짝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 <모가디슈>를 보고 구교환 배우님에게 더 강하게 스며드는 바람에.. 그의 주연작 외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던 필모그래피를 찾던 중 딱! 운명적으로 <김씨 표류기>가 떠올랐다. 안 그래도 언젠가 다시 한번 봐야지 싶었던 영화인데, 거기에 그의 뽀짝한 시절을 아주 잠깐이나마 볼 수 있는 영화라니. 오늘은 이거다 싶었다.



어릴 땐 몰랐는데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현재에 만족한다고 해서 그것이 탄탄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김씨 표류기>의 주인공 김씨들이 마주한 현실도 딱 그렇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 김씨는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가 부도나고, 당장 살아가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새로운 희망과 돈을 끌어썼지만 남는 건 곱절로 불어난 빚과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뭐 했냐”는 사회의 질책뿐이다. 김씨는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한강으로 뛰어드는데 자살시도마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가장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화려한 도시 서울의 한가운데, 시간이 아주 느긋하게 흐르고 있는 유일한 대자연이자 또 다른 세계의 품에 안긴 김씨는 ‘어차피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죽는 것은 미뤄두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한다. 단, 원래 살던 세계에서가 아닌 서울의 룰을 벗어난 무인도라는, 그를 쫓는 것들이 없는 세계에서 말이다.



또 다른 주인공 여자 김씨는 쉼 없이 흘러가는 도시 속에서 홀로 멈춘 시간을 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닌 지나간 오늘을 착실히 삭제해가는 인물이다. 쓰레기가 가득한 어두운 방안, 그것도 모자라 그 방 안에서 가장 비좁은 옷장 안에서 어떻게든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뽁뽁이를 가득 채워 넣고 겨우겨우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자 김씨. 그는 자신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고 스스로 고립된 세상을 만들게 된다. 인터넷 너머로만 소통을 이어가며 형체 없는 삶을 계획해가던 그녀는 어느 날 발견하게 된 남자 김씨의 흔적을 보고 조금씩 커튼을 열어간다. 무인도에서, 좁고 어두운 방 안에서 보이지 않는 타인의 온기와 날카로운 외로움을 느끼며 또 새로운 하루를 표류해가는 김씨 둘의 이야기가 가끔은 발랄하게, 가끔은 잔잔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김씨 표류기 시놉시스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 한강의 밤섬에 불시착한 남자. 죽는 것도 쉽지 않자 일단 섬에서 살아보기로 한다. 모래사장에 쓴 HELP가 HELLO로 바뀌고 무인도 야생의 삶도 살아볼 만하다고 느낄 무렵. 익명의 쪽지가 담긴 와인병을 발견하고 그의 삶은 알 수 없는 희망으로 설레기 시작한다. 자신의 좁고 어두운 방이 온 지구이자 세상인 여자. 홈피 관리, 하루 만보 달리기… 그녀만의 생활리듬도 있다. 유일한 취미인 달 사진 찍기에 열중하던 어느 날. 저 멀리 한강의 섬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리플을 달아주기로 하는 그녀. 3년 만에 자신의 방을 벗어나 무서운 속도로 그를 향해 달려간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7천만 원이 2억으로 늘어나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는 대부업 앞에서 삶의 희망을 잃은 남자 김씨(이하 김승근)는 죽기로 결심하고 한강으로 향한다. 승근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엔 ‘희망’이 없다. 다니던 회사는 부도가 났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아무리 발버둥 치고 소리쳐도 알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다. 무인도에 떨어졌다며 구조 전화를 걸어도 119 구급 대원과 수정이는 매정하게 전화를 끊고, 쓸모없는 상담전화는 그의 마지막 생명줄인 휴대폰 배터리를 끝까지 털어먹는다. 다급해 죽겠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는 상담사의 목소리와 전기도 없는데 자비 없이 밥을 달라며 졸라대는 휴대폰 음성이 야속하기만 하다.


승근은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 원래 살던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이 공간에서 다시 살아남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야속한 도시를 향해 “진짜로 안 들리냐!!”며 소리치지만 도시는 여전히 승근에게 관심이 없다. 승근은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한다. 그는 혼자였다. 여자 김씨(이하 김정연)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두운 밤, 섬에서 소리치고 있는 승근을 바라보고 있는 단 한 사람, 정연. 그 또한 사회에서 고립되어 자기 방안에만 갇혀있는 인물이다. 왕따에 의한 트라우마로 세상에 나설 용기를 잃은 그는 미니홈피를 만들어 나만의 가짜 세상을 만든다. 미니홈피 안에 있는 건 당연하게도 모두 가짜. 용기도 희망도 없는 어두운 방안이지만 정연은 아직도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좁은 옷장 안으로 들어가 뽁뽁이를 잔뜩 휘감고 잠에든다. 나대신 충격을 흡수해 줄, 나를 감싸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걸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두터운 외로움과 두려움은 쉽게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적을 바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승근은 버려진 오리 배를 줍고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며 섬 생활을 나름대로 잘 버텨나간다. 정연은 승근을 보며 동질감과 흥미를 느낀다. 정연은 승근을 외계인 같다고 말한다. 정말 단어의 뜻대로 ‘외계인’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모두가 바쁜 도시에서 특이하게도 혼자 멈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외계인’에는 정연 본인도 포함된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두 사람은 이름도 목소리도 모르지만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희망 따윈 바라지 않았던 승근은 짜파게티 분말 스프와 봉지에 있는 희망이란 단어를 보며 다시 희망과 미래(짜파게티를 먹을..)를 꿈꿔보는데, 시간이 흘러 도착한 정연의 편지와 밭에 난 작은 새싹은 승근에게 새로운 동력이 된다.



HELLO- 습관적으로 외쳤던 이 인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느끼던 외로움의 절반, 아니 8-90%쯤이 날아간 기분이다. 무겁게 비치진 않지만 승근은 외로운 사람이다. 한강에 뛰어들기 전에는 따스하게 그의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 없었고 섬에 들어와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으니, 그는 허수아비와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달랜다.


정연의 경우엔 과거에 동급생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자신의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설 수 없어 사진을 도용하고, 가짜 세계를 꾸미면서 다른 이들이 달아주는 댓글을 통해 외로움과 의미 없는 오늘 하루를 지워간다. 작은 세계 안에 갇혀 두터운 외로움을 느끼던 두 김씨는 서로의 존재를 벗 삼아 내일을 맞이할 용기를 낸다.



김씨들에게 서로의 존재와 짜파게티는 ‘희망’이다. 승근은 짜파게티를 먹겠다는 희망을 갖고 밭을 가꾸고 섬에서의 생활을 더욱 열정적으로 꾸려나간다. 정연은 승근에게 쉽게 얻을 수 있는 희망인 짜장면을 배달하지만 승근은 그를 거절하고 끝내 자신의 손으로 이뤄낸 희망을 한 그릇 완성한다. 승근의 희망인 짜장면을 되돌려받은 정연은 그가 보내온 거대한 희망 한 그릇을 삼키며 옷장에서 벗어나 방바닥에서 잠을 자기 시작한다.


                                                                        

요만큼도 허락이 안 되는 거야?


현실은 이들에게 왜 이렇게 매정한걸까. 승근이 짜장면 한 그릇을 완성하고 정연이 옥수수를 키우며 새로운 희망을 꿈꾸자마자 그들의 세상은 다시 무너진다. 정연의 미니홈피는 거짓인 게 탄로 나고 승근의 섬은 홍수로 인해 폐허가 된다. 홍수가 끝나고 한강 정화작업을 하러 온 공익 요원들은 승근을 노숙자로 보고 그를 섬에서 쫓아내려 한다. 처음 내 손으로 만든 나의 세상이 전부 쓸려내려가고 이렇게 허무한 현실이 다가온다.


사실 승근은 자신이 무인도에 완전하게 고립되었다고, 뭘 해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서 분리되었다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보트만 한번 타면 접근할 수 있는 도시와 가까운 섬. 매일같이 지나가는 유람선에 매번 손을 흔들거나 불을 피웠다면 반년쯤 되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발견될 수도 있었고, 하다못해 짜장면 배달원과 함께 오리 배를 타고 나갈 수도 있었다. (매일 잠을 자던 승근의 오리배도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유람선을 피했고, 반년이 되는 시간 동안 섬을 탈출하지 못한다. 아니, 안 한다와 못한다 그 중간 어딘가에 걸쳐있다. 나가봤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승근은 자신을 끌어내려는 공익 요원들에게 “그냥 여기 있게 해주세요.”라고 애원한다. 그에겐 아무도 없는 외롭고 불편한 섬 생활보다 다시 도시 속에서 살아갈 팍팍한 삶이 더 두렵다.


                                                                        

1년에 2번,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내 세상을 만나는 시간.


섬에서는 짜장면과 가끔씩 도착하는 누군가의 편지가 희망이었는데, 섬을 벗어나고 나니 승근이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죽기’뿐이다. 그는 흙이 가득한 지갑을 버스 단말기에 대며 다시 현실로 돌아왔음을 실감하고 확실하게 죽기 위해 63빌딩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뒤로 정연이 따라 달린다. 타이밍 좋게 울린 민방위 훈련 경보 덕분에 두 김씨를 서로 잘 알지 못했던 희망과 만나게 된다.


정연은 1년에 2번 있는 민방위 훈련이 온전한 ‘내 세상을 만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멈춘 시간을 살아가는 그 순간. 내가 당당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순간. 정연은 봄에 만난 내 세상에 들어온 승근을 가을에 만난 내 세상에서 다시 마주하고, 이번엔 마냥 지켜보는 게 아닌 용기를 내서 악수를 청한다. 나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멈춘 순간, 작은 세계에 갇혀있던 김씨 둘이 눈을 맞춘다. 그리고 훈련 경보가 끝나고 다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멈춘 시간 속, 고립된 나만의 세상에서 홀로 살아온 두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순간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던 외로움과 불안감 속에서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잃어가고 있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용기를 내 세상으로 나온 정연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My Name Is 김정연.” 그리고 묻는다. “Who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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