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리뷰 해석 /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성장, 로맨스
러닝타임 : 145분
감독 : 뤼도릭 부케르마, 조란 부케르마
출연 : 폴 키르셰, 앙젤리나 워레스, 질 를르슈, 사이드 엘 알라미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1992년 여름 동부 프랑스. 기어가는 벌레, 날아가는 파리 소리마저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한 숲속 호수. 그 근처를 맴돌고 있던 15세 소년 앙토니는 지루함을 느낀다. “심심해 죽겠어.” 앙토니의 말 한마디가 정적을 깬다. 앙토니와 사촌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보트를 훔쳐 강너머 누드비치로 향한다. 앙토니는 그곳에서 부유한 집안의 딸 스테파니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의 세상에 편입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 수상 소식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큰 관심을 받은 영화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다양한 계층 갈등과 소년의 사랑, 성장을 담고 있는 아름다우면서도 아릿한 이야기다.
한여름에 만난 첫사랑과 설렘, 일탈과 만취의 짜릿함, 무모한 걸 알면서도 내뻗어보는 주먹, 바이크를 타고 시원하게 내달려보는 숲길, 그 아래 흐르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록 음악. 이 영화엔 청춘의 치기와 여름의 낭만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것을 모두 전복시키는 무거운 현실의 불편함도 함께 담겨있다.
앙토니는 특별할 것 없는, 사실 평범하다기엔 조금 모자란 집안에서 자란 소년이다. 제철 공장에서 일했던 아빠는 술독에 빠져 폭력성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졌고 집안 경제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엄마는 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힘이 없는 두 부모는 바이크와 여행이라는 꿈을 접어두고 현실에 한껏 휘둘리고 있다.
아직 어린 앙토니는 이런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 고향을 떠나 텍사스로 가고 싶고 걸어서는 갈 수 없는 부촌인 드랭블루아에 사는 스테파니와 친해지고 싶다. 하지만 앙토니는 몇 번의 여름을 지나며 알게 된다. 타고난 운명을 벗어나 새로운 계층으로 편입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걸어서는 닿을 수 없는 드랭블루아
앙토니와 스테파니의 동네가 의미하는 것
스테파니는 앙토니와 사촌을 드랭블루아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한다. 그런데 앙토니의 집에서 드랭블루아까지 가려면 꼭 바이크가 필요하다. 앙토니는 파티를 포기할까 고민하다가 아빠 몰래 바이크를 훔쳐 타고 파티에 가기로 결심한다. 바이크를 끌고 나오는 앙토니를 발견한 엄마는 앙토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기곰, 인생이 언제나 재밌는 건 아냐.”
앙토니는 엄마가 대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엄마를 뒤로하고 사촌과 함께 바이크를 타고 파티로 향한다. 모르는 얼굴들 사이를 헤매던 앙토니는 스테파니와 친구들 앞에서 보란 듯 약을 한번 들이켜고는 아주 조금 그들의 세상에 녹아든다.
앙토니는 스테파니와 친해지고 싶다. 그런데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앙토니는 파티에서 스테파니 무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약을 먹고 스테파니를 따라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스테파니 무리가 무시하는 유색인종 아신에게 발을 걸기까지 하며 그들과 친해지려 한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앙토니가 붙여준 담배를 물고는 금방 파티 주최자 시몽과 함께 사라지고 앙토니가 한 발자국 다가가 키스를 시도하자 그를 밀쳐내며 거리를 벌린다. 앙토니는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파티가 끝난 후 남은 건 도난당한 바이크의 빈자리뿐이다.
앙토니는 소외된 집안의 아들, 스테파니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두 사람 사이엔 가난한 집안과 잘 사는 집안이라는 계층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어린 앙토니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스테파니에게 사랑을 표현하지만 매번 다른 이유로 실패한다.
앙토니와 스테파니가 들판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두 사람은 앙토니가 살고 있는 가난한 동네와 스테파니가 살고 있는 부유한 동네를 주제 삼아 이야기를 나눈다. 앙토니는 가난한 동네엔 나체족 집시들이 캠핑카에 모여 살고 있다고 운을 뗀다. 이때 스테파니는 자신도 어릴 때 할머니와 잠시 그 동네에 살았는데, 그때 스테파니의 아빠가 담장을 쳐서 들판에 있는 나체족을 안 보이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스테파니와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확실히 분리되어 있음을, 그 동네에 사는 앙토니와 스테파니 또한 가까워질 수 없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같은 선에 서있는 앙토니와 아신
앙토니와 아신은 파티에서 처음 만난다. 앙토니는 부잣집 백인 아이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아신에게 발을 걸며 자신은 그와 다른 계층의 사람임을 주장한다. 그런데 앙토니에겐 슬픈 일이지만 사실 앙토니와 아신은 ‘소외된 사람’이라는 같은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계층은 두 사람의 아빠 세대부터 이어진다. 앙토니와 아신의 아빠는 제철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였고 노동자와 이민자로 상위층보단 하위층에 속한 삶을 살아왔다. 아빠들과 다른 시대를 살아온 앙토니와 아신은 이런 접점이 없어 일찍 친구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오해했을 뿐이지, 결국 두 사람의 삶은 비슷한 길로 흘러간다.
바이크 사건 이후 앙토니와 아신은 오해를 쌓아간다. 앙토니에게 앙심을 품은 아신은 바이크를 불태워 돌려주고 화난 아빠에게서 도망친 앙토니는 다른 바이크를 타고 그를 찾아가 총을 겨눈다. 겁먹은 아신은 오줌을 지리고 앙토니를 반드시 죽일 거라 다짐한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이 서있는 바닥을 보면 중앙에 그어진 선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보통 두 사람을 충돌시키거나 그들의 다름을 표현하는 경우엔 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팽팽한 대립이 일어나는 신임에도 불구하고 앙토니와 아신을 같은 선 위에 나란히 세워놓는다. 앙토니와 아신이 같은 선 위에서, 같은 계층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연출은 이후 96년에 앙토니의 아빠 파트리크가 호수로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실감한 파트리크는 삶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호수로 걸어들어간다. 이때 위에 있는 달빛이 물에 반사되어 마치 파트리크가 그 달빛 위를 걸어가는 듯한 그림이 만들어진다. 아신은 그걸 지켜보다가 파트리크가 사라지자 그가 걸었던 달빛 방향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그를 구하려 한다. 물이 깊어지자 뒤돌아 빠져나오긴 했지만 아신 또한 파트리크와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하는 듯한 장면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앙토니
앙토니의 짝눈, 외모 변화가 가지는 의미
앙토니는 짝눈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92년, 사촌은 “네 짝눈 때문에 여자들이 도망친다”라고 앙토니에게 장난 어린 디스를 한다. 앙토니는 그에 딱히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헛소리 말라는 듯 받아칠 뿐이다. 이때 앙토니는 앞머리를 길게 길러 자신의 짝눈을 반쯤 덮어두고 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앙토니에겐 외적인 변화가 생긴다. 사춘기를 상징하는 여드름의 흔적이 점점 옅어지고 머리는 점점 짧아진다. 그러면서 앙토니는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다. 그는 마지막 여름이었던 의가사 제대 직후 스테파니에게 차였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짝눈을 제대로 의식하고 만져본다. 정말 짝눈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건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토니의 짝눈은 그의 외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가 가진 가난, 그의 계층을 상징하기도 한다. 짝눈을 머리카락으로 덮고 있던 92년의 앙토니는 자신의 가난과 집안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테파니에게 끝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도전하고, 아신과 같은 낮은 계층의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다.
94년 여름. 16세의 앙토니는 머리를 조금 짧게 자른다. 앙토니는 여전히 스테파니에게 구애를 하긴 하지만 스테파니가 받아주지 않자 이전에 자전거 앞을 막아세웠던 바네사를 찾아가 관계를 가진다. (바네사는 이웃사촌으로 앙토니와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이때의 앙토니는 자신을 쫓아오는 무언가에서 도망치거나 사랑하는 것을 쫓는 모습을 보여준다.
96년 여름. 18세가 된 앙토니는 군 입대를 위해 머리를 짧게 깎는다. 재회한 앙토니와 스테파니는 육체적 관계를 나누지만 구경꾼들에 의해 중단된다. 스테파니는 바로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앙토니는 헤드라이트를 따라 멀어지는 스테파니를 지켜보고만 있다.
98년 여름. 앙토니는 오랜만에 사회로 나와 사촌과 그의 아내, 아신, 스테파니를 만난다. 사촌은 부유한 뒤립씨 딸 클레망스가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해 가정을 이뤘고 아신도 누군가의 남편이 되어있었다. 두 친구를 만난 후 앙토니는 아빠의 바이크를 훔쳐타고 드랭블루아에 가던 날처럼 아신의 바이크를 훔쳐타고 스테파니를 찾아간다. 하지만 스테파니는 우리의 사랑은 네 상상일 뿐이라며 단호하게 희망의 불을 꺼버린다. 계층을 넘기 위한 앙토니의 마지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앙토니는 짝눈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계층, 현실을 확실히 인식한다. 그리고 지금껏 애써 품어온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듯이 훔친 아신의 바이크를 돌려주겠다는 연락을 남긴다.
아빠의 바이크, 자켓이 의미하는 것
앙토니는 바이크를 타고 달리며 자유로움과 희망을 느낀다. 시원한 바람과 그 뒤를 따라오는 새로운 삶을 향한 설렘. 그는 바이크를 타고 스테파니를 향해, 미래를 향해 달린다. 앙토니의 아빠도 언젠간 그런 삶을 살았을 것이다. 바이크를 타고 자유로움과 희망을 느끼던 삶.
하지만 아빠는 자신의 계층을 바꾸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아들은 아빠의 자켓을 입고 언젠가 아빠가 달렸을 그 숲길을 달린다. 그들(어른들)뒤에 남겨진 아이들은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세상이 변해 누드 비치는 누드 비치가 아니게 되었고 도시를 이끌었던 제철공장은 문을 닫는 변화가 생겼지만 사람들 간의 계층은 여전히 견고하다.
앙토니가 아빠의 바이크를 훔쳐 파티에 가던 날처럼 계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즐거운 인생을 살면 좋을 텐데, 엄마의 말처럼 인생이란 언제까지나 즐거울 수 없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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