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월드랠리팀이 2022 WRC 4차전 포르투갈 랠리에서 포디엄 성공
‘그레이블(비포장도로)을 제압한 자가 챔피언십을 차지한다’. WRC에는 노면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랠리가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그레이블 랠리다. 이유는 단순하다. 챔피언십 가운데 그레이블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스팔트와 얼음이 혼합된 개막전 몬테카를로와 풀 스노 랠리였던 스웨덴 그리고 시즌 첫 타막(포장도로) 코스였던 크로아티아 랠리를 치른 2022 WRC는 드디어 포르투갈에서 비포장도로에 발을 들였다.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이탈리아와 케냐, 에스토니아, 핀란드, 그리스, 뉴질랜드 등 올해 계획된 13전 중 무려 7전이 그레이블 랠리다. 그 시작점인 포르투갈은 신차의 성공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전인 셈이다.
1967년 시작된 포르투갈 랠리는 1973년부터 WRC에 들어와 이후 29년간 자리를 지켜온, WRC 가운데서도 역사와 전통의 이벤트 중 하나다. 2000년대 초반 잠시 WRC를 떠났지만 2007년 복귀해 여전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올해 역시 아름다운 항구도시 포르투 북쪽에 위치한 마토지뉴스(Matosinhos)에 랠리 본부를 마련했으며, 스테이지 구성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코스는 속도가 빠르면서도 테크니컬하다. 시야를 가리는 엄청난 흙먼지도 무시할 수 없는 장애물. 동일한 코스를 반복해 달리면 흙이 파이면서 예리한 바위나 돌이 노출돼 타이어를 빠르게 마모시키므로 타이어 관리에도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현대 월드랠리팀은(이하 현대팀) 크로아티아에서 더블 포디엄을 달성했던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 과 오트 타낙(Ott Tanak) 외에 다니 소르도(Dani Sordo)를 엔트리에 올렸다. 개막전부터 연속 출격 중인 누빌과 타낙과 달리, 세 번째 차를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와 나누어 타는 소르도에게는 랠리1 신차로 참전하는 첫 경기다. 그래도 지난해 2위를 비롯해 지금까지 5번의 포디엄을 기록할 정도로 포르투갈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왔다. 솔베르그는 티무 수니넨(Teemu Suninen)과 함께 WRC2에 엔트리했다.
한편 도요타팀은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a), 엘핀 에반스(Elfyn Evans), 타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 외에 디펜딩 챔피언 세바스티앙 오지에(Sébastien Ogier)를 다시 기용했다. 포드팀은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와 피에르-루이 루베(Pierre-Louis Loubet)를 엔트리하는 한편, 노장 세바스티앙 로브(Sébastien Loeb)까지 무려 5대의 랠리1 랠리카를 준비했다. 다만 12명의 랠리1 참가자 중 팀당 정해진 3명만이 매뉴팩처러즈 챔피언십 포인트에 합산(상위권 2명분)된다. 현대팀은 누빌, 타낙, 소르도, 도요타팀은 로반페라, 오지에, 에반스이고, 포드팀은 브린, 로브, 포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목요일 저녁, 포르투갈 제4의 도시 코임브라(Coimbra)에서 개막식을 치른 행렬은 바로 도심 외곽에 있는 2.82km의 SSS(슈퍼 스페셜 스테이지)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코임브라 대학 운동장 인근 도로에 마련된 특설 코스에서 누빌이 톱타임으로 종합 선두로 나섰다. 2위는 타낙, 3위는 브린이었고 그린스미스, 오지에, 로반페라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포르투갈 랠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금요일은 동쪽으로 이동, 알가닐(Arganil) 주변의 3개 스테이지를 두 번 반복한 후 SS8 모르타구아(Mortágua)를 거쳐 SS9 루사다(lousada)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랠리크로스 경기장인 루사다 스테이지는 2.82km로 길지 않지만 2대씩 함께 출발하는 방식(side by side)이라 보는 재미를 제공하며, 참가자에게는 불꽃 튀는 경쟁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날 8개 스테이지의 총거리는 121.67km로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도중에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마라톤 구간이어서 오전의 작은 트러블이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7개 스테이지를 마치고 서비스 파크로 돌아올 때까지는 드라이버와 코드라이버가 차에 실린 공구만으로 차를 수리해야 한다.
흙먼지 날리는 진짜 그레이블 스테이지에서 승기를 잡은 것은 에반스였다. 금요일 오프닝인 SS2와 SS3를 잡은 에반스가 종합 선두에 올랐고 타낙이 그 뒤를 바싹 추격했다. 시즌 첫 그레이블 랠리는 역시나 가혹했다. 9회 챔피언에 빛나는 역전의 용사 로브에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SS5에서 좌 코너를 빠르게 진입한 로브는 오른쪽 벽에 충돌하면서 뒷바퀴가 꺾여 더 이상 주행이 불가능했다. 타이어도 문제였다. 피렐리측에서는 새로운 하이브리드카에 맞춰 스코르피온 타이어의 내구성과 강도를 개선했다고 밝혔지만 오지에와 타낙, 브린 등 우승 후보들이 펑크(펑처) 혹은 림에서 타이어가 빠지는 문제로 고생했다.
종합 8위까지 밀렸던 누빌은 페이스를 끌어올려 SS6을 마쳤을 때는 종합 2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드라이브 샤프트 파손으로 SS8에서 많은 시간을 잃고 우승권에서 밀려났다. 게다가 기어박스 문제로 고전하던 타낙은 두 번의 펑크(펑처)로 선두에서 3분 이상 멀어졌다. 이제 현대팀에서는 소르도가 유일한 희망으로 떠올랐다. 선두는 에반스였고 13.6초 차이로 로반페라가 뒤따랐으며, 소르도는 선두와 44.4초 차이로 종합 3위. 가츠타, 그린스미스, 루베, 누빌, 브린, 포모, 타낙 순으로 금요일을 마무리했다.
토요일은 아름다운 마토지뉴스 북동쪽에 위치한 카브레이라 산맥에서 6개 스테이지를 소화한 후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SSS16)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경기 구간은 164.98km. SS12와 SS15가 열리는 아마란테(Amarante) 스테이지는 37.24km로 이번 경기 중 가장 길다.
오전 스테이지는 에반스와 로반페라가 톱타임을 주고받으며 선두 경쟁을 이어갔다. 게다가 근소한 차이로 소르도를 추격하던 가츠타가 SS12에서 종합 3위로 부상, 도요타가 1-2-3위 체제를 이루었다. 선두 경쟁의 긴장감은 오후 스테이지에서 극에 달했다. 특히 SS14에서 에반스와의 시차를 6.6초 줄인 로반페라는 SS15에서 종합 선두로 부상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로반페라보다 4분 늦게 출발한 에반스는 진창으로 변한 노면과 싸워야 했다. 누빌은 SS15에서 압도적인 톱타임을 기록했지만 소르도와 1분 가까운 시차로 종합 5위에 머물렀다.
포드팀에게도 매우 어려운 하루였다. 하드 타이어를 선택했던 루베는 페이스를 끌어올릴 수 없었고, 그린스미스는 뱅크와 충돌하면서 스티어링이 파손되어 리타이어. 덕분에 타낙이 8위로 한 단계 올랐다. 로반페라가 선두로 토요일을 마무리했고 에반스가 5.7초 차이로 2위. 그 뒤로 가츠타, 소르도, 누빌, 브린, 루베, 타낙, 포모 순이었다. 소르도는 3위 가츠타와 5.7초 차이로 포디엄 가능성이 남아 있다.
일요일에는 5개 스테이지 48.87km 구간에서 일전을 치렀다. 특히 SS19와 최종 SS21(파워 스테이지)이 열리는 파페(Fafe)는 최초의 WRC 포르투갈 랠리 때부터 존재했던 전설적인 스테이지. 길이는 11.18km에 불과하지만 전망이 좋아 멋진 장면을 제공한다. 특히 스테이지 막판, 언덕배기를 구불구불 내려와 페드라 센타다 점프로 이어지는 구간은 포르투갈 랠리의 백미. 이 절경을 보기 위해 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오프닝 SS17에서 로반페라가 톱타임으로 에반스와의 시차를 8.4초로 벌리며 우승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로반페라와 에반스의 우승 다툼만큼이나 포디엄 마지막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가츠타와 소르도의 경쟁도 치열했다. 3위인 가츠타와의 기록 차이는 5.7초, 4위로 일요일을 시작한 소르도는 SS17에서 그 차이를 1.2초로 줄였다. 그리고 SS18에서 0.9초, 다음 SS19에서 0.8초까지 따라붙었지만 SS20에서는 2.2초로 다시 벌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최종 스테이지뿐. 로반페라가 톱타임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 가운데 소르도가 스테이지 2위 기록으로 가츠타를 눌러 종합 3위에 올라섰다. 극한의 서바이벌이었던 포르투갈에서 로반페라가 시즌 3승을 차지했다. 에반스가 15.2초 차이로 종합 2위. 3위는 랠리1 신차 첫 출전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현대팀 소르도가 막판 대역전극을 성공시키며 시상대 한자리를 차지했다. 가츠타와의 시차는 불과 2.1초였다. 누빌과 타낙이 5위와 6위에 올랐고 루베, 브린, 포모가 뒤를 이었다. 일요일 아침을 8위로 시작했던 타낙은 두 번의 스테이지 톱타임을 기록하며 두 계단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한편 누빌은 공력 파츠 파손으로 파워 스테이지에서 마음껏 몰아붙일 수 없었다.
다시 승수를 추가한 로반페라는 드라이버즈 챔피언십에서 106점으로 훌쩍 앞서 나갔고, 누빌은 60점으로 2위 자리를 유지했다. 가츠타가 3위, 타낙이 4위로 부상하고 에반스가 5위가 되었다. 팀 순위는 도요타팀이 175점으로 선두, 현대팀이 116점으로 그 뒤를 쫓고 있다. 다음 5라운드 이탈리아 랠리는 6월 2일에 열릴 예정이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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