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바엔 차라리 현지화하는 게 낫겠다...
[# 1] 인도의 상공부 장관이 한국 기업을 꼭집어 비난했다...
2023년 2월 인도의 기업가들과 정책결정자들이 모인 ‘아시아경제대화(Asia Economic Dialogue)’ 컨퍼런스 석상에서 인도 상공부(Ministry of Commerce and Industry) 장관인 피유시 고얄(Piyush Goyal)이 마이크를 잡았다. 인도 외무부(Ministry of External Affairs)와 인도의 민간 싱크탱크가 공동주최한 컨퍼런스로서 인도 제조업의 부흥을 주제로 논의하는 자리였다. 고얄 장관은 납품단가가 조금 비싸더라도 자국 내 부품공급업체를 선호하는 한국과 일본을 ‘애국심이 많은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반면, 납품 단가가 단돈 1루피라도 싸면 경쟁국인 중국으로부터 부품을 수입해서라도 생산단가를 낮추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도의 산업계에게 ‘애국심’을 가져 달라는 취지의 일장연설을 쏟아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 대한 그의 언급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얼핏 들으면 한국과 일본의 ‘애국적 행동’에 대한 찬사였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명백한 ‘돌려까기’였다. 게다가, 인도에 투자한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를 콕 집어서 ‘부품 현지화에 적극적이지 않은 한국기업들 때문에 인도의 무역수지 적자 규모가 엄청나다’라는 취지로 발언하기까지 했다. 그의 발언을 그대로 옮겨와 보았다.
“(인도내) 자동차 산업의 경우 100% 국산화가 되어야 하는 산업이라고 나는 믿는다....(중략) 하지만, 현대와 기아차는 부품 현지화에 있어서 성과가 부진하며(laggard)이며, 한국에서 부품을 부문별하게(indiscriminately) 수입하는 등 한-인도간 자유무역협정의 혜택을 즐기고 있다. 이 두 회사가 인도에 투자한 규모는 5억에서 10억 달러 내외에 불과할 텐데, 그 이후로 인도가 입은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엄청나다. 난 공개석상에서 이것을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They have cost us very dear. And I don't mind saying it publicly).”
[# 2] 현대와 기아차가 인도에 해악만 끼쳤나?
자, 상황을 다시 정리하자면 세계 제5위의 경제대국에서 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상공부 장관이 자국에 진출하여 영업 중인 한국의 1위, 2위 자동차 기업을 공개 저격한 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고얄 장관의 말대로 인도 경제 해악만 끼친 존재들인가? 그렇지 않다. 약 25년 전에 인도에 진출한 현대자동차는 수천 명의 현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에게 안정적인 직업과 상대적인 고소득을 제공해 왔다. 25년이면 거의 한세대에 달하는 긴 기간이다. 그동안 현대차 인도법인에서 근무한 인도인은 모르긴 몰라도 빈곤층에서 벗어나 중상류층으로 수직상승했을 것이다. 그 집안에서 태어난 수만 명의 아이들 역시 넉넉하고 안전한 가정환경 덕분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고 좋은 교육도 받았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자동차 인도법인이 인도에서 생산하여 외국에 생산한 ‘수출차량’의 대수는 이미 매년 10만 대 수준을 훌쩍 넘어서면서 인도 경제에 귀한 외화를 벌어다준 효자 중의 1등 효자가 바로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이다. 현대/기아차와 협력업체들이 그간 한국으로부터 부품을 수입하면서 인도 정부에 납부한 엄청난 규모의 수입관세와 안정적인 경영의 결과로 납부한 법인세 규모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여기에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 그리고 삼성전자가 입주한 산업단지 주변에 식당이나 기타 상점을 차려서 성공한 자영업자들을 포함해서 간접적인 경제개발 효과를 다 합치면 엄청난 규모일 것이다. 한마디로 인도 경제의 발전 도상에 함께한 귀한 동반자이다.
반면, 고얄 장관이 원하는 대로 우리나라 자동차 업체들이 인도 현지업체를 이용하려 해도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그들로부터 부품을 납품받으려 해도 높은 사양의 부품은 도저히 품질관리가 되지 않는다. 품질을 겨우 맞췄다 싶으면 납기를 포함한 다른 문제들이 불쑥불쑥 터져 나와서 우리나라 완성차 업체를 괴롭힌다. 아슬아슬한 인도 현지 제조업체의 품질 관리 및 납기 관리능력에 기대자니 너무나 불안한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대와 기아차 입장에서는 인도 정치인의 비난이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인도 정치인들도 다 알고 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인도 국민들이 가진 외국 자본에 대한 반감은 뿌리가 깊다. 인도 정치인들은 이런 반감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표밭을 다지는데 도가 터 있다. 걸핏하면 공개 석상에서 인도 산업계에게 국산품 애용을 홍보하는 척하면서 한국기업을 ‘돌려 까고’ 더 나아가 한국 정부를 간접적으로 압박한다. 현지 신문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상공부 장관의 발언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서 정작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수입 관세도 성실하게 납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사의 맨 귀퉁이에 슬쩍 한 줄 적어 넣거나, 그나마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 3] 왜 우리만 미워할까? 인도가 우리나라에 각을 세우는 이유는?
도대체 인도는 왜 우리나라를 이렇게 달달 볶아대는 걸까? 인도의 교역 구조를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아래의 표는 2022-2023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의 인도 교역규모를 인도 상공부가 발표한 자료이다. 인도는 한해 동안 약 2,631억불의 무역수지 적자를 시현했는데, 가장 큰 무역수지 적자의 원흉은 중국(832억불)이었다. 인도가 생산하는 각종 물품의 중간재를 중국으로부터 많이 들여오기 때문인데,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기로에서 오랫동안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한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나머지 나라들은 모두 인도가 수입하는 원유, 가스 등의 천연자원 공급 국가들인데, 유독 2개의 나라가 예외적이다. 우리나라(146억불)와 스위스(144억불)이다. 뜻밖에도 일본과 인도의 교역규모는 우리나라보다 작은 편이어서 무역수지 적자 규모도 약 100억불을 기록하면서 10위권 밖에 위치해 있다. 인도 역시 우리나라처럼 주요 에너지원을 해외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호주와 같은 나라와의 교역에서 발생하는 무역수지 적자는 ‘어쩔 수 없는 적자’라고 생각한다. 또한, 인도 사람들이 워낙에 고가의 보석류와 장신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스위스와의 무역수지 적자는 대충 눈감고 넘어간다. 그런데, 인도가 보기에 한국은 정말 눈에 띌 수밖에 없다. 한국은 석유나 가스를 생산하는 나라도, 스위스처럼 고급 시계나 보석을 생산하는 국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도의 입장에 빙의해서 인도와 한국 사이의 교역 구조를 분석해 보자. 2010년 양국 간에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는데도 불구하고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인도로의 수출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는데, 인도에서 한국으로의 수출은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인도 정부는 한국에서 인도로 수출되는 자동차 부품, 전자기기 부품이 인도 현지 생산으로 전환되기만 하면 엄청난 규모의 무역수지 적자도 해소되고 인도 내 일자리 문제도 해결될 거라는 결론을 도출한 거다. (물론, 인도의 제조업과 인프라가 그럴만한 수준이냐의 문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한-인도 무역 역조의 주요 원인은 인도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현지화 노력 부족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인도의 유권자들에게 소구하는 것이다.
[# 4] 이럴 바엔 차라리 완벽하게 현지화되는 것이 낫겠다...
자국에 진출한 외국기업에게 온갖 종류의 압력을 행사해서 세금을 뜯어내거나 자국의 납품업체로부터 납품을 받도록 강요하는 행태는 인도에서는 흔한 일이다. 앞서 언급한 고얄 장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도 철강업계가 그의 든든한 뒷배라는 사실은 웬만한 인도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철강업계의 가장 큰 수요자는 누구일까? 완성차업체들이다. 적당한 품질의 차를 적당한 가격으로 만들어서 파는 인도 토종 업체들은 적당한 품질을 가진 인도 국산 철강제품을 대량으로 구매해오고 있다. 하지만 현대와 기아차만은 그럴 수 없었고 결국 비싼 가격에 한국산 철강을 꾸준히 사용해오고 있다. 이쯤 되면 고얄 장관이 한국 자동차 업체들을 콕 집어 비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도내 토종기업인 마루티와 합작법인을 설립하여 1980년대 중반에 인도에 진출했던 일본의 스즈키 자동차도 우리의 현대자동차와 비슷한 고생을 했다. 그 후 약 20년 넘게 꾸준히 성장하여 80%라는 믿기 어려운 승용차 시장 점유율을 기록한 2003년 7월 마루티-스즈키는 인도 증시에 상장했다. 1주당 165루피로 시작한 주가는 2024년 7월 중순 현재 12,600루피에 육박하면서 약 80배 정도 상승했고, 주가총액(market capitalization)은 약 4조 루피(한화로 약 60조원)에 이르는 엄청한 규모가 되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인도 주식투자자들이 마루티-스즈키 주식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인도 정치인들도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주가가 떨어지는 날이면 마루티-스즈키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마루티-스즈키를 향한 어이없고 때로는 뻔뻔한 인도 정치인들의 비난과 간섭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진정한 ‘현지화’에 성공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과 2010년 중반에 각각 인도에 진출한 현대차와 기아차는 합쳐서 약 25%에 달하는 높은 인도시장 점유율을 달성했다. 한때 80%에 달하던 마루티-스즈키의 시장점유율을 50% 수준까지 끌어내린 일등공신(?)이 바로 현대자동차이다. 현대자동차 인도법인이 인도 증시 상장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의 각종 언론에는 현대차의 성장에 대한 찬사와 쪼개기 상장 아니냐는 눈길까지 다양한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인도에서 4년 넘게 살면서 외국계 기업들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는지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꼈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조금은 다른 측면에 보였다.
지금까지 품질과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현대자동차는 인도 정부와 ‘혼자서 독고다이로’ 싸워왔다. 하지만, IPO를 통해 수많은 인도의 주식투자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최소한 ‘혼자서 독고다이로 싸우기’ 국면은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인도 정부와 정치인들의 선 넘은 참견과 오지랖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다. 스즈키가 1980년대에 인도에 진출했으니 현대차의 인도 진출은 스즈키에 비해서 약 10년 정도 늦은 셈이고, 스즈키가 2003년에 인도 증시에 상장했으니 상장은 20년 이상 늦은 셈이다. 하지만, ‘현지화’라는 방향은 잘 정했다고 여겨진다. 현대자동차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주식시장에 상장할 걸...(^_^;)’이라는 행복한 후회를 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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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일부 편집을 거쳐 딴지일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www.ddanzi.com/ddanziNews/81502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