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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술호근미학 Jun 05. 2019

상실과의 화해, 영화 <하나레이베이>

죽은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

할아버지의 죽음

10살 무렵 일요일 아침이었다. 집에서 만화를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으셨다. '네? 네...' 짧은 대답만 하시곤 한동안 수화기를 놓지 않으셨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그는 황급히 옷장을 열어 검은 양복을 꺼냈다. 양복을 갈아입고 검은 넥타이를 메시며 나에게도 장례식장에 가야 하니 준비하라 하셨다.

'누가 죽었는데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버지의 상실감

할아버지는 호상이었다. 80세가 넘은 나이로 주무시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할아버지를 모시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계셨다. 밤새 우셨는지 눈은 벌겋게 충혈되고 마치 델리만쥬를 눈에 붙여놓은 마냥 크게 부어 있었다. 열 살 어린 인생에 어찌나 슬펐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눈이 저렇게까지 부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장례식장은 슬픔과 애도로 가득했다. 나는 사실 할아버지를 그리워할 만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할아버지는 줄곧 큰집에서 지내셨고, 내가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노환으로 귀도 먹고 말을 잘 못하셨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에서 대여한 검은 양복을 입고는 있었지만, 장례식장의 그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져 단지 그 상황을 관찰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말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웃으며 이야기하는 시간도 줄고  대부분은 침묵하셨다.


<하나레이 베이>

사람의  목숨은 영원하지 않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게 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명제임에도, 막상 죽음이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닥치면 그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상실과 회복의 과정을 글로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 중에 하나다. 그는 단편 모음집인 도쿄 기담집에서 이  상실과 회복에 대한 글들을 실었다. 그중에 하나인 <하나레이 베이>가 얼마 전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개봉된 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한국에 선을 보였다. 평이 좋았는지 이번에 일반 극장에도 상영하게 된 모양이다.


줄거리


10년 전 일본인 사치는 아들이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 도중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녀는 아들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하나레이 해변으로 떠난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로 사치는 매년 아들이 죽었던 그 맘 때쯤 하나레이 해변을 찾았다. 그녀는 매일 같은 시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이 죽고 난 후 10년이 되던 해에  예년과 마찬가지로 사치는 같은 때, 같은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우연히 죽었던 아들 또래의 일본인 서퍼 두 명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두 명의 서퍼는 사치에게 외다리인 일본인 서퍼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때부터 사치는 무엇에 홀린 마냥 일본인 외다리 서퍼를 찾기 시작한다.

사치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결혼하여 타카시를 낳는다. 하지만 남편은 마약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사치는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타카시를 키우게 된다. 그렇게 성인으로 자란 타카시가 급작스럽게 죽어버렸다. 사치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하나레이 해변을 매년 휴가 때마다 찾았다. 사치는 낮에는 해변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저녁에는 바에 가서 피아노를 치기도 하며 하와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슬퍼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참아 오던 슬픔이 타카시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본인 외다리 서퍼를 찾는 것에 몰두하며 터져 버린다. 비로소 그녀는 상실과 정면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치는 아들을 이해하고 아들의 죽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상실과의 화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경험했을 때는 이것이 진짜 인지 아닌지 몸으로 체험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상실을 거부하려 든다. 하지만 이미 머리는 알고 있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슬픔을 경험한다. 그 슬픔이 끝난 후에서야 비로소 상실과 화해할 수 있다. <하나레이베이>는 상실을 거부하던 사치가 비로소 그 상실과 화해하는 장면을 담아냈다. 상실을 경험한 관객들은 사치의 모습을 보며 상실과 힘겹게 싸웠던 지난날들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을 흘림으로써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갖게 된다.


돌아온 아버지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고 평상시의 모습대로 돌아왔다. 잘 웃으셨으며 말도 많이 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다시 몰두할 수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를 잃었던 그 상실과 화해한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가 어떻게 그 상실과 화해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상실감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모두 다 터뜨렸을 것이다. 인정하고 터뜨리는 것. 그것들이 상실과의 화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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