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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MJ Dec 01. 2023

핫플보단 산굼부리

자연의 위대함

2023.09.21.THU (D+7)

5시 반 기상. 일어나자마자 얼른 어제 읽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마저 읽는다.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전에 독일인 부부가 그날 여행 계획을 짜는 소리를 듣고, 그도 계획을 세우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리스본은 관광 명소나 여행 무대로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곳은 그가 자기 인생으로부터 도망쳐 온 장소였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도시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한 번쯤 타호 강을 지르는 유람선을 타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정말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원하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은 강풍이 불면서 제법 가을 같은 위세를 풍긴다. 오늘로 제주살이 7일째.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해야겠다는 조용한 압박감이 납처럼 누른다. 제주.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일까? 

모르겠을 땐 일단 맛있는 걸 먹자! 부랴부랴 근처 유명 셰프의 우동 맛집을 검색해 예약까지 해본다. 아무것도 아직 한 건 없는데 할 일이 정해졌다는 것만으로 괜히 스스로 대견하다. 벌써 이른 점심시간은 예약이 다 차 주린 배를 붙잡고 오후 2시까지 외출 준비를 천천히 해 나가 본다.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건물 외부와 인테리어. 좌석이 가득 찬 실내와 웨이팅으로 북적이는 외부. 먹기도 전에 벌써 맛있을게 틀림없을 거라며 예약에 대한 칭찬을 남편에게 강요하며 입장해 메뉴를 고른다. 만원이 넘는 우동 메뉴들에 조금 주춤하지만, 맛있다면 아깝지 않다며 애써 흔쾌히 주문한다.

 고루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냉우동/온우동 세트 메뉴와 카레우동을 골랐고, 음식은 꽤 금방 나왔다. 기대와 함께 후루룩 들이킨 첫 입! 음...??? 와..! 정말 그냥 우동이다!! 조금 더 깔끔한 것 같기도 하고, 면발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맛알못(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인가...?? 갑자기 좀 전에 내 기대감을 높였던 예쁘고 비싸 보이는 인테리어와 식기들이 이제는 겉치레로 낯설게 느껴진다.

 퇴사와 제주살이를 결정하면서 이 선택이 맞나? 수없이 되내었을 때 늘 다짐했다. '내 감정을 믿자.' 다른 잣대와 비교하며 애써 의심하지 말고, 내가 좋으면 좋은 거고 별로면 별로인 게 맞다. 최소한 나에겐. 그리고 사실 남의 판단이 왜 중요한가. 내 감정인데. 2천 개의 리뷰가 이 음식을 검증하진 않는다. 맛을 판단 하는 주체는 타인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니까. 이런 논리는 맛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이들이 유명 핫플에 몇 시간의 웨이팅과 북적임을 견뎌 막상 그저 그런 상품을 힘겹게 취하며 자신의 만족을 스스로 세뇌시킨다.

 

애매한 식사를 마치고 아침의 고민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젠 뭐 하지?' 지도를 열어보니 마침 가까이에 제주 필수 자연 관광지 '산굼부리'가 있었다. 유명한 곳에 한번 실패를 한 나는 남편의 제안이 크게 달갑진 않지만 소화도 시키고, 딱히 대안도 없어서 따라나선다. 아... 지금부터는 글을 쓰는 입장에서 좀 부담스러워진다. 이 아름다움을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흠!흠!

 입구는 제주 특유의 어두운 현무암으로 깔린 길과 돌담들이 잔뜩 흐려진 구름과 어우러져 다크함이 더욱 배가 되어있다. 입장료가 6천원 있어 돈도 내야 되냐며 투덜거림과 함께 입장한 나는 들어서자 나무들의 기세에 말이 쑥 들어간다. 딱 봐도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장대한 키와 건강한 잎들, 세월이 수놓은 이끼들의 예술. 감히 내가 평가할 수 있는 존재 이상으로 보인다.

 걸음을 옮길수록 입구를 맞은 짙은 나무들 뒤로 광활한 오르막의 초원과 끝을 알 수 없는 장대의 수목들이 펼쳐진다. 잘 닦아 놓은 현무암 산책로 옆으로 본 적 없는 스케일의 억새들이 자신만만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마치 바람이 흔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흔들리기를 택한 듯이.

 사진 찍는 건 현재를 즐기는 데 방해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인 나조차도 이건 참을 수가 없었다. 감탄을 연신 금치 못하며 남편과 나는 정신 없이 사진을 찍어댄다. 흐린 구름에 강한 바람이 부는 날씨는 조금은 쌀쌀했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으니 우리도 같이 아름다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남편과 손을 잡고 자연을 한 입 한 입 즐긴다.


 그래.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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