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of Spain

제한된 자유 속에서 여행은 시작된다.

by 히피니스

계절이 바뀔 때 즈음 나의 스페인 여행은 시작됐다. 이번 여름은 기록적으로 너무나 덥다며 만나는 누구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긴긴 여름이 무색하게도 찰나의 폭우가 지나가고 하루 아침 사이 선선한 가을 바람이 불어댔다.

허공에 코를 킁킁대면 맡을 수 있는 공기에서는 가을 냄새가 물씬 났고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인 양 멋대로 뜨겁던 지난 여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그간의 모습은 잊어달라는 듯 한층 성숙해진 모습을 내보였다.

14시간의 비행을 앞두고 나는 전장에 나가는 용사라도 된 듯 온갖 중무장을 해댔다. 몇 차례 비행 경험에서 느낀 바, 발목 위로 올라오는 양말은 오래 신고 있으면 시보리 때문에 간지러우니 짧은 발목 양말을 신어야겠다는 나만 아는 자그마한 비행철학도 생겼다.

몸을 실은 비행기엔 인터넷 연결이 가능했으나 기능은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다. 비행기에서의 시간이란 시끌벅적한 일상과는 분리된 채 주어진 조건 속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기에 이 고독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니까 공중에서 여러 영토를 넘나드는 이 순간 만큼은 어느 곳도,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무소속인 셈이다. 제한 속에서 조용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 기나 긴 비행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이렇게 자유로운 제한이라니! 비행을 시작하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분명히 제한적인 이 상황이 되려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걸 보면 '제한'과 '자유'라는 상반된 두 단어가 구름 위에서는 동일한 단어임이 분명하다.

긴 비행을 시작하며 마시는 와인은 공중의 자유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데 느슨한 여유가 필요한 이 시공간과 참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기내식에 두 잔, 초콜릿에 두 잔 그렇게 넉 잔의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다섯 번째 와인을 받으려는 때 비행 중엔 기압이 높아 금세 취기가 돌 수 있어 연달아 세 잔 이상 섭취는 비추천하고 있는데 괜찮냐는 승무원의 말에 이번이 세 잔째라는 귀여운 거짓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와인 한 잔을 더 마시고는 노곤노곤 잠에 들었다.

어느샌가부터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있냐는 물음에 한결같이 "스페인!"을 외쳤다. 사실 스페인 여행이 나의 버킷리스트가 된 시점이나 이유를 설명하자면 음, 분명한 시점을 말하긴 어렵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좋아하는 <모던 패밀리>의 '글로리아'나 팝가수 '카밀라'의 <Bam bam> 속에서 다뤄지는 스페인어의 발음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으며, 정열과 낭만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생각으로 줄곧 선망해온 것이다. 참고로 내가 처음으로 외친 스페인어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앞서 언급한 <Bam bam> 속 가사인 "asi es la vida si", "¡Sigue bailando!" 이 두 문장이다. "그래, 그게 인생이지.", "계속 춤 춰!"


내가 선망하던 이 곳이 정말 내가 바라던 그 모습 그대로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떠하리라는 기대조차 없이 보여지는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싶은 곳이기에 실망마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무엇이 됐든 두고보자 하는 뾰족한 눈빛보다는 애써 보려하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고픈 진가를 드러내는 것임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