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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이 Feb 19. 2016

취준생 도이씨의 일일

직접 만나 말하면 지겨울 테니까 여기다 털어놓기

오늘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화장을 진하게 했다. 울어서 얼굴 얼룩덜룩해지기 싫으면 알아서 궁상떨지 말라고, 나까지 나를 우습게 만들지 말라고.

2박 3일을 꼬박 밤새, 100초짜리 자기소개 동영상을 만들었다. 불합격 통지와 함께 돌아온 대답은 "본인의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하셨을 것" 이란다. 눈앞의 기업조차 통과하지 못하는데 무한한 가능성은 무슨. 자꾸 거절당하다 보면 내가 나를 못 믿어요 이 양반들아.

내가 기업들에 떨어지는 이유는 단지 학교 간판이 가벼워서라고 생각했는데, 탈스펙 심사에서도 떨어지는 걸 보니 그렇지도 않구나 하는 생각에 막막해진다. 나는 5000장 넘는 사진을 찍어서  그중에서도 선별해서 스탑모션 동영상을 만들었는데, 애프터 이펙트부터 캘리그래피, 온갖 음향효과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잔재주는 다 부렸는데 탈스펙 심사에 입사하려면 솔직한 나를 보여주는 것 정도로는 부족하구나, 내가 부린 잔재주를 넘어 굵직한 뭔가가 있어야 하는구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겠지만, 내 이력서를 봤을 누군가에게. 

"준비된 인재가 여기 있습니다" 이런 소리 말고, 진짜 내가 이력서에 쓰고 싶었던 얘기.


아저씨 차라리 입사지원자들 모아놓고 몸싸움을 하라고 하면 안 될까요 내가 그건 이 악물고라도 어떻게 살아있어 볼게요 내가 동년배 여자애들 중에선 어떻게 체력은 좋거든요 쌍욕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법도 알고요, 드릴질도 잘 하고 용접도 할 줄 알아요. 

있잖아요 당신들이 좋아하는 노오력 당신들이 좋아하는 근성. 나 그거 장난 아닌데. 내가 연극판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소주 세잔 먹으면 기어 다니던 애가 소주 두병까지 먹고, 처음 먹어보는 추어탕 좋아한다고 이빨 까면서 5분 만에 밥을 마셨어요, 덩치 큰 감독님들 식사속도 따라가겠다고요. 내가 46킬로 나가는데, 양손에 조명기 여섯 개씩 들고 날라다녔어요. 기집애 티 안 내려고. 그땐 그 감독님들이 참 무서웠는데, 두 시간 후에 공연 올릴 무대를 부숴먹어도 내 새끼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라고 방패가 되어 주던 그분들이 고마운 줄 몰랐어요 내가

에이, 저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요. 알아요. 이제 남의 잘못도 내가 삼키게 될 수 있다는 거. 욕은 안 해도, 웃으며 다가와 자기 잘못 내 손에 쥐어주고 갈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거.  

  

당신들도 내가 필요 없어요? 

남자 동기한테 술 따르는 것도 펄쩍 뛰며 기겁하던 대학생 때의 나는 없던 것처럼, 술자리에서 뺨 맞아도 웃었어요, 그만큼 재계약하고 싶어서. "재계약하고 싶으면 나한테 어필해봐" 하며 개소리하는 것도 아 어떻게 하면 제가 마음에 드실까요 헤헤 웃으면서. 스무 살의 내가 그리도 경멸하던 '기집애'가 되어봤는데도 내가 필요 없다더라고요. 그럴 거면 말이나 꺼내지 말지. .

자존심 같은 거 매일매일 집에 두고 나갔는데, 시키는 대로  잘할 수 있는데, 당신들은 왜 내가 필요 없을까요. 


하루하루 눈만 뜨고 있어도 시간은 잘도 가고, 나는 숨만 쉬는 것 같은데 돈이 들더라고요.

야금야금 갉아먹은 통장의 잔고는 17만 원, 다음 달 휴대폰요금은 7만 원. 강남역 한번 나가는 데 지하철 요금 2980원. 어차피 다이어트하려고 했으니까 밥값은 됐고, 포트폴리오 작업을 위해선 재료비가 필요한데 어디서 구해야 하나 계산기만 두드리고 있어요.

2016년 새해가 밝았고,  열여섯 장의 이력서를 썼고, 한 번의 서류합격을 했어요. 

취업 시장에선  스물여덟은 할머니라고. 기가 막혔죠 난 이렇게 예쁜데 할머니라니. 근데 그렇담 뭐 그런 거지 뭐. 당신들이 보기에 내가 그렇담 그런 거지요. 나이는 줄이는 수술이 없는데 어디 가서 깎아달래야 할까요. 


나는 내가 너무 좋은데 나는 내가 너무 괜찮은데 서류 두 장에 나를 훑어본 양복 입은 당신들은 내가 별로라고. 그런가 봐요 나는 내가 진짜 좋은데 당신들은 내가 별로인가 봐요 차라리 머리에 꽃 달고 춤이라도 추라면 춤이라도 출 텐데. 내가 뭐가, 얼마나 별로인지 콕 집어 말해주면 좋은데.

아, 당신들이 맘에 안 드는 그게 혹시 대학 졸업장이고 그게 또 나이인가요? 그래도 한번 물어보지 그래요 내 입으로 대답할 기회라도 주면 안 되나요. 뭐 하느라 학교를 그런 델 나왔냐고, 뭐 하느라 그 나이 먹도록 그러고 있냐고. 사실 뭐 대답은 정해져 있어요 "차이를 느끼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근데 거짓말 아녜요. 진짜예요. 나 그 어떤 학교를 나온 애들이랑 일해도 뒤쳐진 적 없어요. 

 

중환자실. 살아 돌아온 장한 내 친구. 너에게도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오늘은


네 병원 앞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못했다
병실에서 심심해할 네 생각도 났지만 매일이 심심한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 방금 긁은 엄마 카드가 이상하게 자꾸 목에 걸려서. 가족도 못 챙기는 년이 사람 구실은 하겠다고 친구 돌보려는 그 가식적인 꼬라지가 웃겨서.

있잖아 가족들 등골 빼먹고 나 하나 잘 되겠다고 이기적인 딸 이기적인 동생 다 해 먹을 거면 잘 됐어야 됐는데. 너무 내 멋대로 살아서 원망할 사람은 그저 대답 없는 하나님뿐이고 하나님 나한테 왜 그래요 나보다 못됀 애들도 반짝반짝하고 잘 사는데 왜 나한테 그래요 너무하잖아요 원망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 없고 그렇더라.

언니 경찰공부  뒷바라지하느라 노래를 포기하고 대학을 포기한 착한 딸, 예쁜 동생이었던 너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는 걸 보면, 착하게 살아도 잘 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자꾸 들더라. 너보다 나쁜 내 처지가 이 정도인 걸 보면 나는 차라리 더 나빴어야 했나. 그러면 지금보단 덜 서글펐을까.  


 스물여덟, 졸업한지 4년이 지나 포트폴리오를 만들겠다고 엄마 카드를 들고 학원에 등록하러 간다. 한심함으로 줄을 세운다면 나는 몇 번째일까.

한 달치 학원비는 45만 원, 육 개월치를 한 번에 현금으로 가져오면 150만 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하하하 웃어넘기며 한 달치 학원비를 겨우 결제했다. 

학원 상담 실장은 이왕 엄마 카드로 긁는 거 육 개월치를 결제하면 어떠냐 농담했고 그때의 내 표정은, 거울을 못 봐서 모르겠지만 되게 뻣뻣하게 웃은 것 같다. 머리 끝까지 술로 가득 채우고, 집에 와선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1g의 짐이라도 덜 주고 싶어서. 내가 힘들어하면 엄만 더 힘들 테니까. 몇 배로 무거울 테니까. 

엄마는 자꾸 말라가는데 엄마한테 업혀있는 나는 자꾸 살이 찐 느낌이다 내가 너무 무겁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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