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공간을 다시 그린다
우리는 언제부터 공간에 지배당하기 시작했을까. 혹은, 그 반대는 가능할까. 공간은 단순히 벽과 천장이 있는 물리적 구조를 넘어서, 인간의 인식과 시간, 기억, 감정을 담는 그릇이다. 그리고 그 그릇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나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된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Dasein)라 했다. 인간은 단순히 세상 안에 놓인 존재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의미를 구성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간은 그저 주어진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살아지는’ 장場이다. 같은 방에 있어도, 기쁨의 시간과 고통의 시간은 전혀 다른 공간을 만든다.
즉, 공간은 물리적인 형태 이전에 시간과 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내가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어떤 기억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공간은 전혀 다르게 인식된다. 좋은 환경도, 나의 불안이나 지침 앞에선 위협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낡고 비좁은 곳도 안정을 제공할 수 있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중립적이지만, 인간의 해석을 통해 정치적이거나 정서적으로 ‘편향된’ 장소로 전환된다.
시간 또한 이 관계에서 중요한 변수다. 우리는 공간을 소비하는 동시에, 시간 속에서 공간을 재해석한다. 과거에 머물렀던 장소를 다시 찾았을 때 느껴지는 낯섦은, 공간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동안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무언의 증명이다. 공간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의 궤적을 따라 구성된다.
그렇다면 공간은 나를 지배하는가, 혹은 내가 공간을 지배하는가? 정답은 양자택일에 있지 않다. 공간과 나 사이에는 언제나 서로를 조율하는 상호작용이 있다. 공간은 나를 조건짓고, 나는 그 조건 안에서 의미를 구성하며 다시 공간을 정의한다. 그 균형의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간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공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 공간을 완전히 통제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힘을 갖는다는 뜻일 것이다. 불완전한 환경 속에서도 내 시간과 의식을 지켜내고, 때로는 익숙한 구조마저 낯설게 보려는 의지가 그 시작이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이 공간 안에서 어떤 태도로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공간이라는 틀 너머의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