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만 한다면?

밀밭의 종달새

by 쓰는 인간


"응? 뭐야?"

한참 업무를 하고 있는데, 스마트 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앨범이었다. 작년 여름휴가 때 찍은 사진들을 모아서 영상을 만든 모양이다. ‘신기하다’란 생각보다는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염병 때문에 전 지구가 어려움을 겪는 건 먼 중세시대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불과 1년이 지나 올해 휴가는 집에 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다면 그때 4박 5일이 아니라 일주일을 내내 놀걸 그랬다.

"00아, 집에 잘 도착했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수에 사는 그 친구는 서울에서 한참 먼 곳에 사는 나와는 다르게 이미 짐도 다 풀고 마침 씻고 나와서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세상에, 집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었어? 거기다 바로 씻었다고? 식사 후 설거지는커녕 밥그릇을 물에 담그지도 않아서 밥풀이 말라붙는다고 매번 등짝을 맞았던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지런함이었다.



여행 다녀와서 바로 가방 정리를 하는 사람이 진짜 있었어?!



“45분에 무조건 씻는다.”
"야, 46분이야."
"뭐하냐..."
“1시엔 무조건 씻을 거야”
"나 간다?"

"00씨, 반장이에요. 아직 중간고사 대체 과제가 제출이 안 된 것 같아서 연락 드렸어요."
"아, 네. 제가 사정이 있어서요. 오늘은 꼭 내겠습니다."

"여보, 실비 서류 접수 했어?"
"아, 아직..."
"저번에 한다고 하지 않았어?"
"빠꾸 당할까 봐 그랬지... 괜히 넣었다 돌려 받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일을 회피하고 미루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시작하는 것을 본다. 시험 기간이 되면 갑자기 정리 되지 않은 책상이 눈에 거슬려 대청소를 시작하거나, ‘인제 그만 놀고 과제 해야지’ 생각하면서도 침대 위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한 것이 어디 먼 나라의 모르는 이방인 이야기는 아니다. 오죽하면 그 옛날 이솝도 우화를 통해 미루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했으니 말이다.


종달새가 어느 밀밭 한가운데 둥지를 틀었다. 밀이 다 익어가는 어느 날 어미 새는 먹이를 구하러 나갔는데, 주인이 밭둑에 찾아와 밀들을 보며 말했다.

"음, 밀들이 아주 잘 익었군. 이제 이웃 사람들에게 추수를 도와달라고 해야겠어." 새끼 종달새들은 그 말을 듣고 어미 새가 돌아오자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엄마, 큰일 났어요. 밀밭 주인이 이웃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밀을 모두 베어버린대요!”

이 말을 어미 새는 웃으며 ‘아직 이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주었다. 과연 어미 새 말대로 밀밭은 그대로 있었다. 밀밭 주인이 다시 나타났다.

"아휴, 나쁜 사람들. 자기들 필요할 때 도와주었는데, 막상 내가 도와달라니 다들 거절을 해? 안 되겠다.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해야지."

새끼 종달새들은 다시 호들갑을 떨었지만, 어미 종달새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남에게 도와달라며 마냥 핑곗거리나 찾고 기다리는 사람의 말은 믿지 않아도 된단다."

그 말처럼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도 밀을 베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내 더는 미룰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주인은 다시 나타나 말했다.

"아이고, 안 되겠다. 이제 내가 나서서 베어야겠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어미 종달새는 새끼들에게 말했다. "자, 때가 되었구나. 여기를 떠나자!"

- 이솝 우화 중 ‘밀밭의 종달새’ -


그제서야 종달새는 둥지를 떠났다.



혹시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게으른데 완벽주의자라고?' '완벽주의자가 게을러?'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유형의 사람은 생각보다 주변에 많다.


보통 ‘완벽주의 성향’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을 반드시 완벽하게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압박감과 더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가에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들이 이런 유형이다.

완벽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추구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과하게 의식하는 태도는 결국 마음의 짐을 떠안기 싫어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거나, 핑계를 대며 시작을 미루게 만든다.


이런 모습이니 당신은 ‘나는 완벽주의자라서 그래’ 아무리 말해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서 뭔가 보여주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 당연하다.


'This is Sparta!'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영화 '300'의 원작 소설 ‘불의 문’을 쓴 소설가이자 극작가 스티븐 프레스필드는 이런 말을 했다.


"아마추어는 일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프로는 자신이 결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냥 하는거지.”


누가 프로일까? 아마추어들이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염려하며 머뭇거릴 때 무작정 일을 시작하고 보는 그가 바로 진짜 프로다. 막상 시작하고 나서 당장에 보이는 것은 하얀 백지뿐일지라도 개의치 않고 일단 시작하는 사람이 프로다.


영감이나 창의력은 결국 꾸준함이 없다면 별 소용 없을 것이다. 아니, 꾸준함 없이 영감과 창의력이 무한정 샘솟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피겨 금메달리스트 김연아는 스트레칭을 하는 중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다. 아디다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Just do it'이란 문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오늘도 내 안의 누군가는 ‘야, 그냥 그거 조금만 더 있다가 해’하겠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은 당신이라면 다른 한쪽에서 들리는 ‘그냥 해’ ‘제발 지금 그냥 시작해’라는 또 하나의 울림을 무시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 소리에 홀려 그냥 하다 보면 누군가 '어떻게 거기까지 가셨어요?' 묻지는 않아도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언제 여기까지 왔지?' 생각하며 지난 순간들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미루던 그 일을 지금 시작해라. 그냥 해라. 시작부터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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