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신비롭고 충만한 인생의 장
오늘은 아버지의 췌장을 검사한 의사와 진료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진료실에서 이름이 불린 순간, 대기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달려오는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와 어깨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리를 맞이하는 의사의 얼굴에는 윤이 흘렀다. 젊음과 자신감이 만든 광택이었다. 아버지는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잠시 뒤, 이 의사가 아버지에게 암에 걸리셨다는 사실을 알릴 것이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날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었다. 주인공이신 아버지만 제외하고.
의사가 먼저, 나와 오빠를 바라보며 환자와의 관계 물었다.
"아들이고요." 오빠가 말했다. 그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딸입니다." 그 말이 우리 셋을 투명하고 단단한 실로 연결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셨다.
의사는 아들처럼 친근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아버님, 내분비 내과에 당 때문에 입원하셨잖아요."
"그랬죠."
"그때 CT 찍었을 때 췌장에서 뭔가 보여서 조직검사를 했는데, 췌장암이 나왔어요.”
오빠와 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한쪽으로 고개를 갸웃하셨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닌가 하신 눈치셨다.
의사가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확진은 된 거고요, PET CT 찍은 후 수술 또는 항암 여부는 외과 선생님께서 봐주실 거예요."
"아...."
그뿐이었다. 놀라움이라고 하기에도, 탄식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정갈한 한 음절이었다. 그 뒤에 '그렇군요.'라는 말이 덧붙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말투였다.
지난 며칠 동안, 암 자체보다 아버지께서 받으실 충격이 더 걱정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진료실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셨다.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발걸음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비에 젖어 무거운 외투를 현관에 걸어두고, 초대받은 곳으로 들어서는 사람 같았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아버지는 긴 시간을 주무셨다. 며칠 동안 아버지를 둘러싼 석연찮은 기운으로 더욱 불안하고 지치셨던 건 아닐까.
이튿날 저녁, 아버지께 전화가 걸려 왔다.
"아이 바이올린 학원에서 돌아올 때 내가 마중 나가마."
비 소식이 있었는데 우산을 챙기셨을까. 우산을 핑계 삼아 아이 학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널목 반대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히 이야기 나누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아니, 다시 보니 다른 점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들어주시던 커다란 바이올린 가방이 아이 어깨에 가뿐히 매달려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자, 아들이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펼쳐 할아버지에게 받쳐 드렸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좁은 우산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히며, 아주 작은 불꽃이 일었다. 그러다 갑자기 검은 우산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멈추어 섰다.
신비로운 우산 속에서 아버지가 천천히 굽은 등을 펴셨다. 눈빛에는 일상을 촘촘히 채운 축복을 한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스며있었다.
두 사람이 천천히 건널목을 건너왔다. 빗줄기가 옷자락을 적셨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빗소리 사이로 아버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름휴가 같이 가자는 친구들에게 말했어. 암에 걸려서 올해는 어렵다고."
그 금기하던 단어가 아버지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시원한 빗줄기가 내 머리를 적시고 가슴까지 스며들었다. 암이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던 두려운 존재가 아닌, 함께 하는 무언가가 된 순간이었다.
빛 가운데 일상이 흘러가고, 일상을 살아간다.
비록 우리가 검은 우산을 쓰고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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